소년이 된 김선욱·조성진, 포핸즈 시작되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고승희의 리와인드]
지휘자 김선욱ㆍ피아니스트 조성진 무대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두 사람의 얼굴에 소년이 내려앉았다. 피아노 앞에 앉아 연주를 하는 동안 이토록 활짝 웃는 김선욱(36) 조성진(30)의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지난 2일 강원도 평창 방림면 계촌마을. 열 살이 된 계촌클래식축제의 최대 이벤트는 단연 피아니스트 선후배 김선욱 조성진의 앙코르 무대였다. 쇼스타코비치 1번 교향곡을 무사히 마치고 난 두 사람은 여러 번의 인사를 마친 뒤 마침내 하나의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이들이 피아노 앞에 앉자, 6000명의 관객은 일제히 함성을 질렀고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이 시작되자 다시 숨을 죽였다. 익숙한 멜로디 선율은 ‘피아노 달인’들의 손끝에서 속도를 높여 시작됐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첫 음을 누르는 순간 둘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 찼다.
제10회 계촌클래식축제의 대미를 장식한 무대는 두 사람이었다. 올해 축제는 ‘클래식계 슈퍼스타’ 조성진의 강림으로 음악팬들 사이에서 진작에 화제가 됐다. 공연계에 따르면 두 사람의 만남은 김선욱이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의 예술감독을 맡게 됐을 무렵 일찌감치 결정됐으나 상당 기간 극비에 붙였다.
2006년 리즈 콩쿠르에서 1위에 오른 이후 피아니스트로의 길을 걸었고, 한국에선 2021년 KBS교향악단 정기공연을 통해 지휘자로 데뷔한 김선욱과 2015년 한국인 최초로 쇼팽국제음악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이 지휘자와 협연자로 만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두 사람의 선곡은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협주곡 1번. 조성진과 김선욱이 이끄는 경기필은 공연 전날 한 번, 공연 당일 계촌의 야외 특설 무대에서 또 한 번의 리허설을 가진 뒤 무대에 섰다.
무대는 여러모로 악조건이었다. 날씨가 도와주지 않았다. 하늘엔 먹구름이 잔뜩 꼈고, 공연 전에 소나기도 쏟아졌다. 다행히 공연을 시작하며 햇살이 야외 무대를 가득 채워줬지만, 습도에 민감한 악기를 다뤄야 하는 연주자들에겐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조성진은 지난해 영국 사우스뱅크센터 로열 페스티벌 홀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을 통해 이 곡을 연주했다. 계촌에서 들려준 연주는 유튜브를 통해 만날 수 있는 섬세한 공연장의 사운드와는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좋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이날도 조성진은 흐트러짐 없는 연주를 완성하며 ‘조스타코비치’의 서막을 열었다. 매공연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날의 공연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오랜 인연을 맺은 ‘절친’ 선후배의 호흡, 시원하게 뻗어오른 신록 아래 자리한 공연장, 열악한 환경에서 온몸을 던진 연주라는 점 때문이었다.
화려하고 현란한 색채의 쇼스타코비치 피아노협주곡 1번은 트럼펫의 짧은 팡파르로 시작, 피아노가 심각한 음색을 드러내며 음악을 장악한다. 조성진은 묵직하게 피아노를 꾹꾹 찍어누르며 주제 선율을 들려줬다. 유려하고 오차없는 완벽한 테크닉의 조성진에게 협주곡의 첫 선율은 다소 단순하다는 인상을 주는 듯 하나 이내 템포가 빨라지면 트럼펫과 피아노는 신나게 까불거리며 뛰어놀기 시작한다. 조성진의 탁월한 리듬감을 만날 수 있는 곡이었다.
이날 피아노는 가장 영롱하고 청명한 소리를 내는 타악기였다. 습기로 인해 건반이 잘 눌러지지 않기도 했지만, 곡의 특성상 조성진은 그 어떤 연주에서보다 온 몸의 힘을 실어 피아노를 터치했다. 대형 스크린에선 조성진의 손끝이 빨개지는 모습까지 담겼다. 근력으로 연주를 끌고간 그는 한 악장 한 악장 지나갈 때마다 오케스트라를 완전히 장악했다. 야외 무대의 한계를 감안해도 피아니스트와 악단의 소리 차이가 꽤 큰 편이라, 때때로 오케스트라는 피아노를 위한 BGM처럼 들렸다. 간혹 날아 들어온 새소리와 풀벌레 소리는 조화로운 게스트가 됐다. 조성진이 한 음 한 음 신중히 누르던 어느 순간엔 바람소리마저 잦아들며 계촌은 숨을 죽였다. 살아 움직이던 모든 것이 멈추며 음악을 위한 한 폭의 그림이 되는 순간이었다.
랩소디 풍의 3악장에선 피아노와 트럼펫이 진중한 대화를 나누고, 현악기가 풍성한 소릿길을 열어주면 4악장에선 피아노의 맑고 청명한 소리가 터져나오며 끝을 향해갔다. 조성진은 다시 피아노를 타악기처럼 두드리고 재즈 피아니스트처럼 리듬을 가지고 놀며 현란하고 화려한 선율로 귀를 간지럽혔다. 협주곡 말미 피아노와 트럼펫이 쉴새없이 주고 받는 속사포 대화, 그 사이로 재빠르게 진입하는 현의 선율이 만들어내는 조화가 일품이었다.
공연 전 몇 번이나 예고된 ‘엄청난 앙코르’는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두 사람이 ‘포핸즈’ 무대를 꾸미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조성진의 ‘헝가리 무곡’ 포핸즈 연주는 2009년 그의 스승인 신수정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와 서울스프링실내악축제에서 선보인 이후 15년 만이다. 공식적으로 남긴 영상 중엔 그렇다. ‘스타 솔리스트’인 조성진이 포핸즈를 연주하는 것 자체가 흔치 않은 데다, 김선욱과 함께 한 연주라는 점에서 반드시 눈과 귀에 담아야 하는 순간이었다. 2분 20초 밖에 되지 않았던 두 사람의 연주는 음악이 주는 행복 도파민을 최대치를 끌어올렸다.
인구 2000명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 고랭지 배추 농사를 짓는 계촌엔 조성진과 김선욱의 만남을 보기 위해 이날 하루 6000여명의 관객이 몰렸다. 선착순 입장을 해야 하는 공연장은 일찌감치 엄청난 줄을 선 사람들로 붐볐다. 야외 특설무대 격인 계촌로망스파크에서 열린 ‘별빛콘서트’ 장은 이미 오후 4시를 조금 넘어선 시간부터 무수히 많은 인파가 줄을 섰고, 돗자리를 펴고 앉을 수 있는 무대와 가까운 ‘피크닉석’은 전날 밤부터 줄이 늘어서 1000번대까지 번호표가 나갔다. 총 다섯 군데로 나뉘어진 주차장은 오후 4시 30분 무렵 만차를 기록했고 인근 주차장과 기차역에서 사람들을 태워오는 셔틀버스가 수없이 들락거렸다.
계촌클래식축제는 현대차 정몽구 재단이 주최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주관, 10년간 이끌어온 음악 축제다. ‘예술마을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이어온 올해 축제엔 조성진과 김선욱의 경기필을 비롯해 피아니스트 백건우, 이진상, 베이스 바리톤 사무엘윤, 소프라노 박소영 등이 무대에 올랐다. 3일간 이어진 축제는 1만4000여 명이 관람했다. 조성진과 김선욱이 함께 한 공연엔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정무성 재단 이사장, 강수진 재단 이사, 김대진 한예종 총장, 김봉렬 전 한예종 총장을 비롯해 피아니스트인 신수정 전 재단 이사장도 함께 했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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