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 칼럼] 헌법 전문은 '장바구니'가 아니다
역사적 사건 넣으면 지속성 해쳐
제정 의의·과정, 이념만 담아야
美 독립전쟁·프랑스 혁명 안 넣어
現대통령 임기 단축·거부권 제한
巨野, 개헌을 정략적 도구로 여겨
홍영식 논설위원
‘1987 체제’ 이후 개헌론은 약방의 감초처럼 등장했다가 사그라들기 일쑤였다. 국가 백년대계가 아니라 매번 ‘사리당략(私利黨略)’ 차원에서 꺼냈다가 변죽만 울렸다. 1990년 3당 합당 때 내각제 추진 비밀 각서, 1997년 대선 때 김대중·김종필의 내각제 개헌 등이 그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통령 4년 연임제 ‘원 포인트 개헌’ 제안도, 박근혜 전 대통령의 개헌 제안도 임기 말 불리한 정국 타개용이었다.
문재인 정부 때 여권이 내놓은 개헌안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헌법정신과 배치되는 내용이 적지 않아 그 지향점을 의심케 했다. 사회적 경제, 경제민주화, 토지공개념을 강화하는 등 국가 개입의 문을 더 확대해 헌법 119조 1항(대한민국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을 훼손했다.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려는 시도도 있었다. 이념적 색채를 도드라지게 하려는 의도다. 개헌을 해도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라는 근본가치를 건드려선 안 되는데 정파적 색깔로 덧칠했다. 헌법이 헌법을 파괴하는 모순이다. 이 기조가 지금 야당의 개헌 틀이 될 것이다. 경제 관련 조항을 대폭 늘려 헌법에 넣으면서 일반 법률로 규정해도 충분한 것들을 줄줄이 명시해 헌법 과잉, 헌법 만능주의도 초래했다.
권력 구조 개편은 정략을 떠나 정치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게 핵심이 돼야 한다. 대통령 중임제든, 내각제든 각각의 장단점이 있는 만큼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야당에서 주장하는 개헌은 거대 야당의 폭주를 위한 도구가 되고 있다. 조국당은 대통령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바꾸자고 하면서 윤석열 대통령 임기를 단축해 대선을 2026년 지방선거와 함께 치르자고 주장한다. 더불어민주당 여기저기서도 현직 대통령 임기 단축 주장이 나온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사법적 판단이 내려지기 전에 대선을 치르기 위한 속셈일 것이다.
‘대통령 재의요구권’을 제한하자는 것은 대통령의 정당한 권한을 막으려는 것으로, 민주주의의 근간인 삼권분립 토대를 흔드는 것이다. 대통령 당적을 없애자는 것은 정당정치를 훼손한다. 대통령 탄핵 소추에 필요한 의석수도 200석에서 180석으로 낮추자고 한다. 검사의 영장 청구권을 삭제하자는 것은 인권보호를 위한 검사의 고유 권한을 부정하는 것이다. 시대에 맞지 않은 헌법 조항이 있다면 고쳐야 하지만, 야당의 개헌론엔 당략만 보인다. 그러다가 소수당이 돼 불리한 정국이 되면 또 개헌하자고 할 건가.
헌법 전문 문제도 짚어봐야 할 대목이다. 여야가 모두 5·18 민주화운동을 헌법에 담자고 한다. 그러나 개별 역사적 사건을 전문에 명기하는 것은 신중해야 마땅하다. 야당에선 5·18뿐만 아니라 동학, 6·10, 4·3, 촛불 시위까지 넣자고 한다. 전문을 두는 이유는 헌법 제정의 의의, 제정 과정, 국가의 근본 가치를 밝히기 위해서다. 이 목적에 충실하지 않고 역사적 사건을 정권 입맛에 따라 넣었다가 빼는 일이 반복되면 헌법의 안정성과 지속성을 해친다. 실제 5차 개헌 때 4·19와 5·16을 담았다가 8차 개헌 땐 빠졌으며, 현행 헌법인 9차 개헌 땐 4·19가 다시 포함되고 임시정부 법통 계승이 추가됐다. 지역마다 5·18뿐만 아니라 2·28 운동, 부마항쟁, 마산의거도 포함하자고 한다. 역사적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넣게 되면 전문이 한없이 길어지고, 지역 정치에 볼모 잡힐 우려가 크다. 정파마다 역사적 관점이 달라 정권 교체 때마다 개헌해야 하는 일이 반복될 수 있다. 헌법 전문은 장바구니가 아니다. 역사적 사건을 기린다면 헌법 전문이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할 수 있다.
선진국이 전문에서 역사적 사실을 일절 넣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237년 헌법 역사를 가진 미국의 경우 헌법 제정의 목적만 있을 뿐 독립전쟁, 노예 해방 등 아무리 의미가 있어도 그 어떤 역사적 사건은 일절 없다. 이 때문에 전문은 우리나라의 3분의 1 정도로 단출하다. 프랑스 헌법 전문에도 프랑스대혁명은 없다. 독일 일본도 마찬가지다. 전문 자체가 없는 나라도 많다. 개헌에서 국민의 보편적 합의와 가치, 공감대가 아닌 특정 진영의 철학을 담는다면 통합 아닌 분열의 길로 치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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