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뷰] 철학 없는 포퓰리즘과 영국 보수당의 자멸
내달 총선서 최악의 참패 전망
원칙 버린 ‘눈앞 한표’에 집착
결국 가치와 표 모두 잃었다
‘수퍼 선거의 해’인 2024년, 가장 중요한 이벤트 중 하나인 영국 총선이 다음 달 실시된다. 리시 수낙 총리의 깜짝 발표로 시행되는 조기 총선이다. 요즘 나오는 여론조사는 14년 동안 집권해온 보수당의 참패를 예고한다. 지지율이 20%대 초반으로 제1 야당인 노동당의 절반 수준이다. 이대로라면 보수당 200년 역사상 최악의 패배를 받아 들게 된다.
영국 보수당은 세계에서 가장 유서 깊은 보수 정당이다. 중산층을 기반으로 개혁을 추진한 19세기 벤저민 디즈레일리를 비롯해 윈스턴 처칠, 마거릿 대처 등 보수계의 거물을 배출했다. 한때 품격과 온정을 갖춘 전통 있는 정당으로 여겨졌던 영국 보수당은 2010년 집권 후 총리 다섯 명을 거치는 사이 조롱 대상으로 추락했다. 보수의 정신을 잃고 좌파적 포퓰리즘을 어정쩡하게 흉내 내는 고루한 정치 집단 취급을 받고 있다.
보수당의 정체성 와해는 2016년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국민투표에서 시작됐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여러 반발에도 1990년대 유럽공동시장(유럽연합 전 단계) 합류를 이끌어낸 사람은 당시 보수당 총리 존 메이저였다. 그는 영국의 시장을 넓혀 경제·산업 성장을 촉진하자며 국민을 설득했다. 지금의 보수당은 반대로 “외국인이 일자리를 앗아간다”고 성내는 ‘목소리 큰 유권자’에 영합해 브렉시트에 동조했다. 자유시장 확대를 통한 발전을 추구한다는 보수의 오랜 가치보다는 ‘눈앞의 한 표’에 집착한 결과다.
기대했던 대로 보수당 지지율은 한때 약간 올라갔다. 하지만 브렉시트라는 역행(逆行)은 경고대로 영국 경제에 재앙이 됐다. 무역은 줄고 외국인 투자자는 떠나고 경제 규모가 감소하는 등 부작용을 피하지 못했다. 세수 축소와 재정 악화는 의료·교육 등 필수 시스템의 쇠락으로 이어졌다. “브렉시트를 완수하자(Get Brexit Done)”는 구호를 앞세워 총리에 당선된 보리스 존슨은 ‘병원 40개 신설, 간호사 5만명 증원’ 같은 비현실적 약속을 남발하며 예산 충당을 위한 세금 인상을 단행했다. 보수의 원칙인 ‘작은 정부’와 상반되는 정책들이다.
다음 총리 리즈 트러스는 갑자기 감세를 단행하며 정반대로 갔다. 세금 깎아준다니 좋아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 이후 닥친 극심한 인플레이션 와중에 나온 사실상의 돈 풀기는 시장에 엄청난 충격을 유발했다. 그는 ‘세상 물정 모르는 보수’의 대명사로 비난받으며 49일 만에 물러났다. 야채만큼도 오래 못 갔다는 뜻으로 ‘상추 총리’란 오명까지 얻었다.
침몰하는 보수당을 이어받은 부유하고 젊은 총리 수낙은 10여 년간 이어진 실정(失政)을 수습하느라 정신없는 모습이었다. 하락하는 지지율을 붙잡으려는 절박함 때문이었을까. 화려한 언변으로 이름난 그는 난민을 소포처럼 비행기에 실어 르완다로 보내겠다는 식의, ‘듣기는 그럴듯한데 비현실적인’(텔레그래프) 정책들을 다수 쏟아냈다. 결국 보수당 14년 집권의 막을 내리는 역할을 하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수낙이 조기 총선 실시를 발표한 날 런던엔 비가 쏟아졌다. 폭우를 피해 실내로 가자고 이끌거나 우산을 받쳐주는 이는 없었다. 비싸 보이는 양복 재킷이 흠뻑 젖은 채 추워서 오들거리는 그의 모습은 영국 보수당의 현실을 보여주는 듯했다. 수낙은 차기 총선 대표 공약으로 둘을 내걸었다. 청년 대상 징병제 부활, 그리고 연금 수급액에 대한 과세 철폐다. 큰 예산이 들어가는 징병제와 막대한 감세안을 동시에 내놓는다? 철학을 알기 어려운 이 두 정책을 관통하는 테마를 이코노미스트는 “노인 지지층에게라도 애처롭게 매달리는 절박함”이라고 표현했다. 난파선에서 뛰어내릴 기회만 기다렸을까. 보수당 의원 5분의 1인 78명이 불출마를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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