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숲] 글은 곧 그 사람이다

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2024. 6. 4.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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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문은 사색하는 공부이자 인격을 짓는 것… 作法은 덧칠에 불과
입시 논술 위해 작법 전략 훈련 받는 학생들… 살아 있는 글 드물어
AI가 글 쓰는 세상에서 인간은 왜, 어떻게 써야 하나 질문할 때
일러스트=이철원

이젠 아득해졌지만, 내게도 대입 논술 출제·평가에 관여하던 시절이 있다. 입시 업무는 기밀 사항인지라 자세한 얘기는 할 수 없고, 다만 이태준의 ‘무서록’ 중 다음 대목으로 마음 한편을 대신한다. “작문에 있어 점수를 매긴다는 것은 가장 불유쾌한 의무다. (...) 90점을 주면서도 이것은 어째서 90점에 해당한다는 논리적인 선언은 할 수 없다. 대체가 감정 속에서 처리되는 것이므로 작문 점수란 영원히 부정확한 가점수일 것이다.”

이태준이 그 옛날 이화여전과 경성보육학교에서 강의한 것은 ‘작문’(글짓기)이었다. 그러면 논술은 무엇인가? 한 대학 입학처에 의하면 “논술은 글쓰기가 아니”며, 인문 논술의 첫째 정의는 “어떤 주제에 대해 논리적으로 서술하는 것”이다. 논술과 글쓰기가 차별되고, 글쓰기와 논리가 분리되었다. 어쩌면 이 이분법 안에 입시 논술의 맹점이 숨어있는지 모른다.

논술만이 아니라 모든 글쓰기가 논리의 산물이다. 논리, 즉 사고와 서술 방식의 정연함 없이는 어떤 글도 성립하지 않는다. 부조리 문학에서조차 ‘비논리의 논리’는 필수적이다. 생각이 없으면 쓸 수 없고, 역으로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기 위해 쓰는 측면도 있다. 이태준이 작문을 “사색하는 공부”라 일컬은 것은 그런 의미였다. 그의 ‘글 짓는 법 A·B·C’는 “작문이란 글을 짓는 것인 동시에 인격을 짓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글은 근본적으로 “마음의 사진”이며, 작법(作法)은 덧칠에 불과하다. 물론 그 덧칠도 마음의 움직임을 따른다. 그러므로 글쓰기는 교육·문화 일반의 “중대한 기초 공사”고 “글은 곧 그 사람이다.”

입시 논술은 그 같은 글쓰기가 아니다. 논술은 주어진 몇몇 제시문을 읽고 비교 분석함으로써 설득력 있는 견해를 피력하는 일이다. 문해력, 분석력, 사고력, 표현력이 모두 필요한 글을 고작 두 시간 안에 써내야 한다. 나는 그렇게 못 한다. 이 엄청난 과제를 완수하려면 생각에 앞서 ‘전략’이 필요하다. 학생은 이르면 초등 과정부터, 늦으면 수능 직후 집중적으로 그 전략을 전수받는다. 전문적인 훈련을 많이 받은 학생일수록 논술형 사고와 표현 방식에 능란할 수밖에 없다. 적당한 양비론과 윤리적 언어, PC(정치적 올바름)를 두루 갖춘, 그러나 혼자만의 오랜 사색에 낯설어하는 ‘표준’ 엘리트가 그렇게 만들어진다.

논술 훈련의 순기능이 없지는 않다. 요즘 학생은 옛날보다 확실히 글을 잘 쓴다. 컴퓨터 자동 기능 덕분이기도 하겠으나, 비문과 오·탈자는 거의 사라졌다. 대신 글이 비슷비슷해졌다. 어떤 사안에 곧장 뛰어들어 텀벙대기보다는, 한 걸음 물러나 비교하고 따지며 대세론에 편승하는 경향이 눈에 띈다. 평가를 의식하면 신중을 넘어 소심해지는 법이다. 어느 주제로건 뭔가를 써낼 능력은 충분하지만, 마음 기울여 생각하고 쓰는 일에는 취미를 잃은 듯하다. 살아 있는 글을 보기 힘들다. 가령 ‘밤길을 걸을 때는 밤하늘의 별을 봅니다’ 같은 단순하고도 정서적인 문장은 오히려 글쓰기를 연습 안 한 이공계 학생에게서나 기대할 수 있다.

내 경험상 학습 능력과 논술 능력은 정비례한다. 그렇다면 논술은 시험으로서 중복적이며, 따라서 굳이 필요 없는 입시 유형인 셈이다. 현재 교육 현실에서는 변별력 있고 유의미한 평가를 하기도 어렵다. 과연 두 시간 안에 제조한 글 한 편이 학생의 ‘잠재적 역량’을 증명해 줄 수 있는가? 그 역량 진단이 정확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논술을 통해 판명하려는 역량의 본질은 대체 무엇인가?

교육부와 대학이 이런 질문을 먼저 하지 않는 것이 유감이다. 왜 쓰는가, 무엇을 위해 쓰는가를 논술은 묻지 않는다. 학생이 어떤 사람인지에 별 관심 없으며, 글쓰기 본연의 교육 기능도 따지지 않는다. 기계적이라고까지 여겨지는 이 시험의 논리 앞에서 ‘글은 곧 그 사람’이라는 이치는 고리타분해진다. 그런데(!) 이제 AI 시대라 한다. 인간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필경 더 논리적으로 서술할 줄 아는 AI 세상에서 인간은 왜, 그리고 어떻게 써야 하나? 그 질문의 시간이 왔다. ‘글은 곧 그 사람’임을 다시 입증해야 할 때다.

이태준은 글쓰기를 “인격의 공사(工事)”로 보았다. 18세기 러시아 작가 카람진(Karamzin)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글은 영혼과 가슴의 초상이므로, 나쁜 사람은 좋은 작가가 될 수 없다고까지 단언했다. 서로 나라와 시기는 다르지만, 이태준과 카람진 둘 다 한 민족의 근대어 형성기에 글을 쓰고 가르친 작가다. 언문일치의 좋은 글쓰기가 개인은 물론 민족의식의 보루라고 믿었던 시대의 사람들이다.

김진영 연세대 교수·노어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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