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과 놀자!/인문학으로 세상 읽기]공감은 늘 옳을까… ‘선택적 공감’은 차별-혐오 낳기도
내가 속한 집단에 과하게 공감하면, 집단 외의 대상은 비난하기 쉬워져
인종-외국인 차별 등 혐오감정 생겨…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도록 노력을
● 공감 능력이 강조되는 이유
공감은 다른 대상이 느끼는 감정과 처한 상황을 이해하려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남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짚어보는 것이 바로 공감이죠. 이처럼 공감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이뤄집니다. 나와 다른 대상 사이에서 관계가 만들어지면 그걸 ‘공동체’라고 부릅니다.
공감은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 되기 위해 필요한 능력입니다. 공감 능력이 부족하거나 발달되지 않은 사람을 각각 소시오패스, 사이코패스라고 부르고 반(反)사회적 성격자로 간주합니다. 물론 반사회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모두 범죄를 저지르진 않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건 인간의 사회성이 공감 능력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면 왜 최근에 공감 능력이 강조되고 있을까요?
현대 사회는 무한경쟁 사회라고도 불립니다. 경쟁의 목적은 성과를 만드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철학자 한병철은 ‘성과사회’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성과사회에서 다른 사람은 공생의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입니다. 그런 만큼 개인은 외로움과 불안, 우울 속에 놓이게 되는데 그 반작용으로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는 공감 능력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또 지금 인류는 4차 산업혁명 가운데 놓여 있기도 합니다. 신이 자신을 본떠 인간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자신을 본떠 인공지능(AI)을 만들었습니다. 인공지능의 출현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질문하는 계기가 되고 있습니다. AI는 인간의 여러 능력을 넘어서고 있지만 아직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은 부족합니다. 한편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다른 사람들과의 연결이 손쉬워지면서 협업이 강조되는데, 이 때문에 공감 능력이 중요하다는 말이 나오는 측면도 있습니다.
● 공감의 부정적 측면
그런데 공감은 부정적인 측면도 갖고 있습니다. 폴 블룸이란 미국 심리학자는 공감이 편향적이거나 선택적이라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사람들은 먼 나라에서 발생한 전쟁에서 많은 이들이 죽었다는 소식보다 자신의 가족이 다쳤다는 소식을 더 아프다고 느낍니다. 나와 더 가까운 사람, 나와 동일하거나 유사한 정체성을 갖춘 집단에 더 공감하는 겁니다. 장대익이라는 과학철학자는 이 때문에 “편향적 공감이 편 가르기로 이어질 수 있다”고 봤습니다. 내가 속한 집단에 대해선 과하게 공감하면서 반대편을 혐오하고 비난하는 사건이 흔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인종 차별이나 외국인 차별도 공감의 편향적 속성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공감 때문에 혐오가 발생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또 공감은 선악을 구별하지 못합니다. 스톡홀름 증후군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공감하거나 동조하는 심리 현상입니다. 이 증후군은 1973년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발생한 은행 강도 사건에서 유래했습니다. 억류된 인질들이 인질범에게 공감하면서 경찰들에게는 적대적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이런 사례를 통해 공감 능력이 곧 선과 악을 구별하는 능력과 동일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 공감의 윤리와 실천이 중요
공감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공동체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능력이면서 혐오와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 때문에 공감이 좋은 방향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공감의 윤리가 필요합니다. 먼저 공감의 편향성을 극복하기 위한 윤리가 필요합니다. 내가 속한 집단과 다른 정체성을 지닌 사람과 집단에 공감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반대편 사람에게 공감하는 건 매우 어렵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그런 자세를 갖추려 노력할 때 공감의 부작용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타자 지향적 공감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성적 사유를 활용하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공감 능력이 나쁜 일에 이용되는 것은 아닌지, 선한 작용을 만들어내는지 주체적으로 판단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질문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최근 많은 이들이 공감을 말하는 이유가 공감을 받고 싶어서일까요, 아니면 공감하기 위해서일까요. 사실 공감을 받으려고만 하면 공감을 통한 상호작용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 공감을 받으려고만 하는 태도는 공감을 강요하게 되거나, 공감하지 않는다는 비난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이 순간 공감은 이데올로기로 변하고 삶을 억압할 수도 있습니다. 공감할 수 없는 것은 공감하지 않아도 될 자유를 용인하는 지혜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박권주 진주 대아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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