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권력자 농락하는 간신들의 세상
허무하게 무너진 전략적 요충지
5만명 대군에 맞선 조·명 연합군
부하 이끌고 달아난 부총병 양원
원균의 전사 소식에 도망친 권율
권율의 거짓말 그냥 넘어간 선조
몇년 전 어느 권력자가 탄핵될 때 논란을 불러일으킨 게 있었다. 그건 문고리였다. 대통령 앞에 '문고리'를 잡고 있는 측근들이 있었다는 걸 꼬집은 말이었다. 어느 시대든 간신들은 권력자 앞에서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권율의 부끄러운 도망을 감싸준 조선시대 서인 대관들이 그랬고, 그때 그 문고리들도 그랬다. 지금은 과연 다를까.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전선의 수는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니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촌철살인의 문법이 아닐 수 없었다. 행간에 숨은 뜻을 추측해본다면 대략 이렇다. "육군에겐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 이래도 죽을 몸, 저래도 죽을 몸이다. 그러니 조삼모사 격으로 나를 흔들지 말아 달라. 내 목숨이 살아 있는 한 왜놈들이 서쪽 바다로 진출해 한양으로 진격하는 일은 쉽지 않을 것이다."
장계를 쓰고 난 이순신은 보성에서 찾은 무기들을 점검하고 운반할 준비를 마쳤다. 마음이 너무나 무거웠다. 이날 이순신은 폭음을 하고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이순신의 마음은 편안하지 않았지만, 수읽기는 정확했다. 왜군의 북진을 막아설 전략적 요충지였던 남원성과 함양의 황석산성이 적의 대공세에 허무하게 무너져버렸다.
남원성에는 조·명연합군 5000여명이 집결, 성 위에 대포를 배치하고 성 둘레엔 깊은 참호를 파놓아 왜적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조선의 병력 규모는 남원부사 임현任鉉의 수비병력 1000명과 전라병사 이복남, 조방장 김경로, 별장 신호, 광양현감 이춘원 등이 이끌고 온 1000여명 등 모두 2000여명이었다.
명나라 쪽에서는 부총병 양원이 이끄는 요동병사 3000명을 배치했다. 전라병사 이복남은 양원의 부름을 받고도 출전하지 않았지만, 도원수의 명령으로 어쩔 수 없게 되자 100여명의 군사를 데리고 왔다. 왜적과의 전투가 두렵기보다는 오히려 명나라 군사들의 꼴이 더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전라도의 기개 있는 지사志士들과 백성들의 감정도 이복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동안 남원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군사들이 부렸던 횡포는 극심했다. 각지에서 백성들의 소와 돼지를 빼앗아 와 날마다 잡아먹고, 술에 취해 여자를 내어놓으라며 폭행까지 했다. 하지만 명군에 반항조차 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런 가운데 8월 12일 가등청정·흑전장정·과도직무 등이 이끄는 왜적의 무리 5만6000명이 남원성을 에워쌌다. 그리고는 다음날 공격을 시작했다. 부총병 양원은 남문 밖에 있는 민가를 불살라 버렸다. 백성들이 울며 원망했지만 별도리가 없었다. 조·명 연합군은 승자총통 등 각종 무기를 쏴대며 하루를 버텼다. 양원은 진작부터 전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유격 진우충에게 지원을 요청했지만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왜군은 15일에 망루를 세워 성안으로 사격을 가하는 한편 사다리를 타고 사면으로 성에 오르는 총공격을 감행했다. 겁에 질린 부총병 양원은 부하들을 이끌고 북문을 통해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자 북문을 방어하던 조방장 김경로가 양원의 말고삐를 붙들며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싸우지 않고 어디를 간단 말이오? 대인은 대명황제의 명을 받아 이 남원성에 싸우러 오지 아니하였소? 어디를 간단 말이오? 이 문을 열 수 없소!" 김경로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양원은 "무례하다"면서 호통을 쳤다. 하지만 김경로의 강경한 태도가 심상치 않자 안색을 바꾸면서 간청했다. "전주에 가서 군사를 청해오겠소. 문을 열어주시오." 김경로는 "아니 되오. 죽기를 각오하고 성을 지켜냅시다"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양원은 김경로의 상관인 전라병사 이복남을 불러 문을 열어줄 것을 요구했다. 이복남은 후환이 두려웠던지 문을 열어주라고 명령했다. 김경로가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어주자 명나라 군사들이 앞다퉈 꽁무니를 뺐다.
양원의 군사가 다 나간 뒤에 전라병사 이복남도 따라 나가려고 했다. 김경로는 자신의 상관인 이복남이 타고 있던 말의 목을 칼로 베어버렸다. 그리고는 "오랑캐 놈들은 다 달아났더라도 조선의 국록을 먹은 병사兵使가 어디를 간단 말이오. 이 성에서 싸우다 죽읍시다"라며 간청했다. 이복남은 김경로의 충의에 감동을 받아 군사들에게 전력으로 성을 지킬 것을 격려했다. 군사들이 죽기로 결심하고 함성을 지르며 남문 쪽으로 이동해 공격해오는 왜적과 대항했다.
하지만 5만 대군의 적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8월 16일 남원성을 지키던 병력은 전멸당했다. 김경로를 비롯해 전라병사 이복남, 별장 신호, 광양현감 이춘원 등 장수들도 모두 전사했다. 살아남은 이는 남원성을 끝까지 사수하던 군관 김효의金孝義 한사람뿐이었다. 그는 죽은 척 논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적군이 없는 틈을 타서 전주성으로 달아나 이날 전투의 진상과 결과를 상세하게 보고했다.
남원성을 점령한 왜적은 마수를 그대로 드러냈다. 남원의 백성을 잔혹하게 학살하고 코까지 베어 갔다. 산과 들이 모두 불에 탄 가운데 남원 땅에 쓰러져 있는 시신이 1만1000여구에 달했다. 왜적은 정유재란 당시 명확한 목표를 두고 있었다.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를 통칭하는 남삼도를 점령하고, 여기에 자기네 민간인들을 이주시킨다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풍신수길은 왜군 장수들에게 조선 백성들을 남김없이 죽이도록 부추겼다. 급기야는 6월 15일 조선인의 코를 베어오라는 명령까지 내렸다.
조선의 문화도 훔쳐갔다. 관아와 가옥을 불태우면서 각종 보물을 약탈했는데, 특히 도자기가 눈에 띄면 쌍심지를 켜고 모조리 쓸어갔다. 도자기라면 밥 먹는 식기까지 털어갈 정도였다.
그 무렵, 도원수 권율은 고성을 순찰하다 조선 수군이 칠천량 바다에서 대패하고 원균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진주로 이동했다. 진주에서 왜적의 북진 소식에 놀라 도원수부 진영인 초계로 물러났다. 초계의 지형은 이순신이 백의종군 시절에 파악한 대로 충분히 적과 대치해볼 만한 장소였다.
하지만 초계에서 대구 팔공산성으로, 다시 팔공산성에서 운봉으로 달아났다. 운봉에서는 휘하 장졸들이 흩어져 버렸다. 권율을 믿느니 도망가는 게 낫다고 판단한 거였다. 이때 승병장 처영은 이렇게 탄식했다. "이 시기에 어리석은 권율을 따라다니다 발병 나겠구나. 아서라, 산중으로 가자."
군사를 모두 잃어버린 권율은 체찰사 이원익과 함께 한양으로 올라왔다. 이때 권율의 사위인 병조판서 이항복은 주변 대신들에게 "권율이 한양을 호위하라는 왕명을 받았다"고 둘러댔다.
권율을 본 선조는 "남방 적세가 거센 이때에 경이 싸우지 아니하고 어찌 상경하였소"라고 물었다. 권율은 "한양을 지키라는 지령을 받아 올라왔습니다"라고 답했다. 선조는 권율의 거짓말에 깜짝 놀라 "내가 모르는 지령이 무엇이냐"며 좌우를 둘러봤다. 그러자 서인 대관들이 나서 "경기 지역이 위태해 권율이 오지 않으면 지킬 수가 없습니다"고 입을 모았다. 거짓을 눈치챈 일부 대신들이 "권율을 탄핵해야 한다"며 주청을 올렸다. 그러나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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