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영일만

김홍수 논설위원 2024. 6. 3.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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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1975년 말 중앙정보부가 “포항 영일만에서 채굴된 석유”라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들고 왔다. 박 대통령은 석유가 담긴 링거병을 집무실에 두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했다. 뭔가 석연치 않다는 참모의 조언에도 박 대통령은 1976년 연두 기자회견에서 “영일만에서 석유가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신문들이 1면 머리기사로 보도했다. 이후 본격 시추에 나섰지만 소득이 없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은 황당했다. 시추 과정에서 윤활유로 투입했던 경유(輕油)가 퍼올려진 것으로 드러났다.

▶1998년 방북해 북한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고 돌아온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평양이 기름 위에 떠 있다”고 말해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정 회장은 “북한 기름을 들여오기 위한 파이프 라인 가설 작업을 곧 시작하겠다”고 했지만, 남북 관계 경색으로 진전이 없었다. 이후 북한에서 유전 탐사 작업을 했던 영국 지질학자가 “북한에 석유 50억 배럴이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서를 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영일만 앞바다에 140억배럴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물리 탐사 결과가 나왔다”고 깜짝 발표를 했다. 석유·가스 수입에만 연 1000억달러 이상을 쓰는 한국으로선 희소식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현실화 가능성이다. 정부는 영일만 탐사 성공률이 20%에 달한다고 하지만,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자는 여론도 상당하다.

▶대서양 북해 유전의 경우 채굴 성공률이 3%에 불과했다. 미국 석유 기업 엑손이 1966년부터 시추공을 30개 이상 뚫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필립스란 회사가 6개를 뚫고도 찾지 못해 포기하려다 마지막으로 뚫은 시추공에서 노다지가 발견됐다. 이후 북해 해저는 거대한 기름 창고임이 확인됐다. 매장량이 680억배럴에 달해 ‘북해 브렌트유’라는 새 원유 브랜드가 탄생했다.

▶네덜란드는 노르웨이보다 10년 앞서 북해에서 초대형 가스전을 발견했지만, 나라에 독(毒)이 됐다. 가스 수출로 재정이 풍족해지자 선심성 복지를 대폭 늘렸다. 임금이 오르고 물가가 급등했다. 결국 주택 버블이 터지면서 경제가 위기를 맞았다. 노르웨이는 네덜란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북해 석유 수출 대금으로 국부펀드를 만들었다. 재정 적자를 메우는 용도로만, 원금은 손 못 대고 수익금만 인출할 수 있도록 법으로 정해놨다. 현재 펀드 규모는 1조6000억달러, 국민 1인당 30만달러(약 4억원)꼴이다. 영일만에서 실제 석유가 나와 이런 ‘고민’이라도 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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