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에서 대중투쟁을 배우다
한미은행 점거 농성으로 구속되자
면회온 가족들 “반성문 쓰라” 읍소
다짐 무너질까봐 이 악물며 거부
징역 2년6개월 선고받고 교도소행
감옥서 양심수들과 함께 정치투쟁
공안탄압 거세져 구속자 늘어나자
고문 당한 뒤 징벌방에 갇히기도
옆방에 서울대생 고문 경관도 투옥
사실 알리려 감옥 안에서 규탄시위
상한 두부 등 열악한 배식 항의 위해
일반 재소자 등과 함께 ‘부식 투쟁’
결국 교도소장 사과 받아내고 승리
서울 영등포 한미은행을 점거 농성했던 16명의 해고자는 모두 구속되었다. 경찰 조사를 받은 뒤 노량진경찰서 유치장을 거쳐서 영등포구치소로 넘어갔다. 유치장에 있을 때 부모님과 형, 동생이 소식을 듣고 들려왔다. 가족들 입장에서는 너무 기가 찬 노릇이 아닌가. 군대를 제대한 지 겨우 10개월 만에 구속이라니….
부모님과 형은 눈물로 호소했다. ‘반성문을 쓰면 감옥에서 나갈 수 있다’는 경찰의 거짓말을 듣고는 제발 반성문을 쓰라며 울먹였다.
“래군아, 반성문 좀 쓰면 안 되겠냐. 나와서 운동하면 되잖니. 너 대학 보내고 부모님이 얼마나 좋아하셨니. 부모님 생각해서라도 눈 딱 감고 반성문 쓰고 나오자.” 노량진경찰서 유치장에 있을 때 형이 갈아입을 옷과 함께 넣어준 엽서의 글씨가 번져 있었다. 눈물로 쓴 편지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전두환 독재에 굴복하면 안 된다, 노동해방을 위해, 민중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기로 했던 나의 다짐이 무너질까 봐 이를 악물었다. 참으려고 했지만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눈물 번진 편지
영등포구치소로 넘어가 지내면서 느낀 사실은 세상에 억울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감옥엔 힘없고, 빽 없고, 가난한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들이 민중이었다. 나는 여러 명이 함께 쓰는 혼거방에서 그들이 살아온 삶에 관해서 묻고 들으려 애썼다. 내 방에는 ‘범털’(가족들이 면회 와서 영치금이나 사식을 많이 넣어주는 재소자를 부르는 은어)보다는 ‘개털’(면회 오는 가족마저 없어서 영치금도 없는 가난한 재소자)이 대부분이었다. 어머님이 바쁜 농사일을 하면서도 꼬박꼬박 면회를 오시니 그 방에서 나는 범털에 속했다. 경찰에 구타당한 몸이 천천히 회복되자 구치소 생활에도 적응했다.
영등포구치소와 영등포교도소는 참으로 열악했다. 서너평 되는 방에 10명 가까운 재소자들이 부대끼며 살다 보니 사소한 일에도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새우잠과 칼잠은 기본이었다. 여름은 찜통더위였고 겨울엔 물통에 얼음이 꽁꽁 얼었다. 여름엔 푸세식 변소에서 구더기가 기어 나왔다. 변기 입구를 아무리 틀어막아도 구더기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렇게 열악한 마루방에서 밥그릇을 늘어놓고 밥을 먹었다. 겨울엔 최전방에서 겪은 것처럼 살을 파고드는 추위에 새벽이면 잠이 깨고는 했다.
1심 재판에서 2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1986년 11월초 영등포교도소로 이감되었다. 내 방은 3사상 10방. 저녁 점호를 마치고 나면 매일 ‘민중의 소리’ 방송을 했다. 쇠창살을 잡고 저렁저렁한 목소리로 창밖을 향해서 바깥세상 소식을 전했다. 마지막은 언제나 전두환 정권을 규탄하는 구호로 끝냈다. 전국의 교도소에 정치범인 양심수들이 넘쳐 나던 때였다. 감옥에 갇힌 양심수들은 옥중투쟁위원회(옥투위)를 만들어 그 안에서도 정치투쟁을 이어갔다. 옥투위는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양심수 가족들로 구성된 인권단체로 1986년 12월 설립되었다)을 통해서 다른 교도소 양심수들과 연락을 했고, 감옥 안에서 전국 동시 행동에 돌입할 정도로 강력했다. 내가 저녁마다 큰소리로 시국연설을 하고 구호를 외쳐도 교도소 측에서는 크게 제지하지 못했다.
1984년에 총학생회가 부활한 뒤 학생운동은 전두환 정권을 더욱 거세게 압박했다. 노동운동, 빈민운동, 재야운동 등도 급성장하고 있었다. 거기에 개헌을 요구하는 야당 공세도 계속됐다. 전두환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공안탄압의 강도를 높여갔다. 1986년 내내 공안사건이 터졌고, 구속자는 급증했다. 그 과정에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부천경찰서 경찰 문귀동이 부천 지역에 위장취업했던 여성 노동자를 조사하면서 성고문을 저지른 사건)이 폭로돼 국민의 분노를 샀다. 그러다가 1986년 10월28일부터 31일까지 나흘 동안 민족해방 계열 학생운동가들이 건국대에 총집결해 대정부 투쟁을 벌이는 일이 일어났다. 정권은 헬리콥터와 최루탄, 물대포를 쏘며 폭력으로 진압했다. 이 사건으로 1525명이 연행되었고, 1288명이 구속됐다.
갑자기 구속자들이 대거 밀려들어 오자 교도당국의 태도가 돌변했다. 걸핏하면 양심수들을 보안과 지하실로 끌고 갔다. 나도 그해 겨울 몇 번이나 거기로 끌려가 구타와 함께, 일종의 비녀꽂기 고문(무릎 꿇은 상태에서 손을 머리 뒤로 묶은 뒤 다리와 연결해 팽팽하게 당기고 머리 뒤로 각목을 끼우는 방식)을 당했다. 이 고문을 당하면 어깨며 팔,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포승줄이 살을 파고들고 통증은 심해진다. 이를 악물고 버텼고 끝내 항복하지 않은 채 징벌방으로 넘겨지곤 했다. 나는 독한 놈이었다. 그렇지만 옥투위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박종철을 살려내라!
해를 넘겨 1987년 1월이었다. 세상과 단절된 감옥 안에까지 서울대생이 고문을 당하다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곧 사실로 확인되었다. 옥투위는 결사투쟁을 결의했다. 1월17일경 저녁 시간에 우리는 일제히 감옥 문짝을 걷어차며 “박종철을 살려내라!” “살인정권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곧바로 경비교도대가 출동했고 우리는 여지없이 끌려가 보안과 지하실에 묶여있다가 ‘먹방’(징벌방의 일종으로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다)에 던져졌다. 일명 돼지묶음(포승줄로 팔을 뒤로 묶어서 다리와 연결해 팽팽하게 당기는 방식의 포박) 당한 채. 깜깜한 방에서 한참을 버둥대고 있는데, 그 방에는 앞서 다른 한 명이 들어와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밧줄을 풀어주었고 나는 수갑마저 빼냈다. 손발이 자유로워지면 배변을 스스로 할 수 있어서 옷에 똥오줌을 지리지 않아도 된다. 그 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이번에는 오래 머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 다음날, 교도소 측에서 우리를 모두 풀어준 뒤 각자의 방으로 돌려보냈다. 어안이 벙벙했다. 곧 그 이유를 알게 됐다. 우리가 들어갔던 먹방 바로 옆이 특별사동인데 그곳에 서울대생 고문 경관들을 수용한 것이다. 이들의 존재를 들킬까 봐 바로 옆 방에 있던 우리를 풀어준 것이었다. 고문 경관이 지척에 있다는 사실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영등포교도소 양심수들은 운동을 가거나, 면회를 나갈 때면 고문 경관들이 수감 중인 특별사동을 향해 질주하면서 외쳤다. “여기 고문경찰이 있다. 살인마를 처단하자!” 그때마다 교도관들은 우리를 붙잡아 입부터 틀어막았다. 교도관들이 ‘제발 소리지르지 말라, 우리 사정도 좀 봐달라’며 통사정 했지만, 우리는 막무가내였다.
그러던 중 배식받은 국에서 쥐꼬리가 나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 우리가 받은 음식은 사람이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옥투위는 부식투쟁을 하기로 했다. 불만이 고조되던 어느 날, 아침 반찬으로 나온 두부조림에서 역한 냄새가 심하게 났다. 나는 두부를 방 밖으로 내던지면서 투쟁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양심수들만 싸우는 게 아니었다. 교도소의 전 사동에서, 모든 방에서, 모든 재소자가 양심수들의 투쟁에 합세해 문짝을 걷어차고 구호를 외쳤다. 결국 교도소장이 사과 방송을 했고, 옥투위는 부식 개선 약속을 받아냈다. 재소자와 함께 한 이 투쟁은 승리로 끝났다. 역시 감옥은 ‘정치대학’이었고, 나는 그곳에서 활동가로 단련되고 있었다.
박래군 |36년째 인권운동가로 살고 있다. 유가협,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재단 사람을 거쳐서 현재는 4·16재단 운영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저서 ‘상처는 언젠가 말을 한다’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 공저서 ‘이따위 불평등’ ‘새로고침’ ‘살아남은 아이’ 등이 있다.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단독] 샤넬 본 김건희 카톡 “오시면좋죠…ㅎ 대통령은.생각보다…”
- 천공 5개월 전 ‘석유 예언’ 확산…“파면 아주 보물덩어리 나와”
- [단독] 채상병 수사 ‘뒤집기’ 결정 전날, 용산-이종섭 보좌관 13번 연락
- 검찰총장, 김건희 여사 소환 질문에 “예외도, 특혜도, 성역도 없다”
- ‘포항 석유’ 깜짝 발표에 당황한 산업부…“대통령실이 결정”
- 최태원·노소영 재판에 따가운 시선…“범죄수익 서로 먹겠다고”
- ‘삐라-오물풍선’ 맞불, 언제든 또 터진다…서해 NLL 충돌 우려
- 작년 종부세 대상자 1년 만에 66% ‘뚝’…납세액도 71% 감소
- [단독] 유엔, 윤 정부에 “여가부 장관 지체 말고 임명” 권고
- “포항에 석유” 처음 아니다…‘산유국 꿈’ 65년 번번이 좌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