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J. 심슨 사건, 현대 미국 문을 연 ‘뒤틀린 복수극’
2024년 4월10일 오제이(O.J.) 심슨이 죽었다. 오는 6월12일은 니콜 브라운 심슨이 죽은 날로부터 정확히 30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러므로 두 죽음 사이에 우연히 가로놓인 첫 시간대인 지금, ‘오제이 심슨 사건’에 관해 쓰지 않을 도리가 없다. 미국의 미디어들은 사건 당시와 마찬가지로 한껏 호들갑을 떨며 이 사건이 현대 미국에 미친 영향을 장황하게 해설한다. 존 F. 케네디 대통령 암살(1963년)이나 9·11 테러(2001년) 때처럼 당대 모든 미국인의 일상에 실시간으로 특이점을 남겼고, 그 영향은 멀게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까지 닿아 있다는 식이다.
가정폭력 기록·범죄 현장서 발견된 증거
문제는 이 사건 요소요소가 지극히 미국적인 콘텍스트로 점철되어 있어, 케네디의 죽음이나 세계무역센터의 붕괴처럼 미국 바깥의 사람들에게도 보편적인 이미지를 제공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일단 심슨부터가 ‘월드클래스’라고 할 수 없는 내수용 셀럽이다. 다만 사건의 요지가 ‘심슨은 누구인가’가 아니기 때문에 사전 설명은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다. 미국프로풋볼(NFL)의 전설로, 또 할리우드의 재간둥이로 1970∼1980년대를 풍미했던 스타 심슨은 1994년 전처 니콜과 니콜의 친구 론 골드먼을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고, 이듬해 재판에서 무죄를 받아 풀려났다.
유명인의 살인 사건이라는 점만으로도 아연실색이었으나 그 충격은 1년4개월 뒤 나온 재판 결과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제 와서 보면, 심슨을 가리키는 증거는 한가득이었다. 범죄 현장과 심슨의 집에서 각각 한 짝씩 발견된 장갑에는 피해자의 혈흔과 체모가 묻어 있었고, 심슨의 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슨에게는 사건 당일 뚜렷한 알리바이가 없었고, 무엇보다 그는 오랜 세월 니콜을 학대한 전력이 있었다. 가정폭력 신고로 경찰이 출동한 기록만 9번이었다. 마지막 출동 보고서에는 “그가 날 죽이고 말 것”이라는 니콜의 증언이 기록돼 있다.
그런데도 심슨은 무죄를 받았다. 심슨이 부와 인맥을 총동원해 꾸린 드림팀 변호인단이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검찰청을 꺾은 결과였겠으나, 이를 가능케 한 결정적 요인 세 가지를 먼저 검토해봐야 한다. 첫째 배심원제, 둘째 재판 생중계, 셋째 인종 갈등이다. 미국 헌법은 배심제를 재판의 기본으로 삼는다. 지역 사회에서 발탁된 12명의 배심원이 전 과정을 지켜보고 유무죄 여부까지 평결한다. 여기에 더해 랜스 이토 판사는 대중의 폭발적인 관심에 호응하듯, 법정에 카메라를 들이도록 결정했다. 두 조건이 결합하면서 심슨 재판은 선거 캠페인 겸 리얼리티쇼가 됐다.
선거 캠페인이자 리얼리티쇼가 된 재판
심슨의 변호인단은 재판의 성격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이해했고, 이 캠페인 겸 티브이쇼의 테마를 ‘인종주의’로 전환하는 작업에 나섰다. 로스앤젤레스는 수십 년 묵은 인종 갈등의 원념을 고이 간직한 도시였고, 1990년대는 그 갈등의 절정부였다. 심슨의 재판 4년 전인 1991년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가 편의점에서 도둑으로 몰려 총에 맞아 사망하고, 흑인 남성 로드니 킹이 고속도로에서 경찰관들에게 집단 린치를 당하는 일이 있었다. 두 사건 모두 가해자가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이쪽도 재판이 ‘사건’이었다.) 여기서 촉발된 1992년 폭동의 여운이 진할 때였다.
변호인단은 피고석에 심슨이 아닌 로스앤젤레스를 앉히기로 했다. 살인 현장에서 초동수사를 맡았던 경찰(마크 퍼먼)의 과거 인종차별 행적을 부각했고, 하나하나 트집을 잡아 로스앤젤레스 경찰의 무능하고 악의적인 업무 관행상 증거가 조작됐을 수 있다는 프레임을 깔았다. 이 모든 퍼포먼스가 흑인 커뮤니티의 트라우마를 자극했고, 운동권의 실력자들도 법원 바깥에서 조력했다. 변호인단의 리더 격이었던 조니 코크런이 이미 흑인 인권 변호사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다. 12명 가운데 9명이 흑인이었던 배심원단은 물론 미국 전역이 강도 높게 몰입했다.
심슨의 재판은 블록버스터였다. 267일간 진행됐고, 1105점의 증거가 제시됐으며, 증인 133명이 출석했다. 속기록만 4만5천 쪽에 달했다. 법정을 다녀간 수많은 인물이 유명세를 얻었고, 당시 유일한 케이블 채널이었던 <시엔엔>(CNN)은 재판 보도로 기념비적인 특수를 누렸다. 유무죄 여부에 대한 여론은 인종에 따라 완벽하게 갈렸고, 재판이 진행될수록 양극화했다. 마침내 배심원단이 결론을 내렸고(협의는 3시간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1995년 10월3일 심슨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백인들은 대체로 울었고, 흑인들은 대부분 환호했다.
가장 아이러니한 점은 심슨이 평생 단 한 번도 흑인 민권이라는 대의에 헌신한 적 없는 인물이었다는 사실이다. 심슨은 같은 시기 무하마드 알리(복싱), 빌 러셀(농구) 등 흑인 스포츠 스타들이 자신의 커리어를 걸고 인종차별에 맞설 때 침묵했다. 그는 입버릇처럼 “나는 흑인이 아니라 오제이”라고 말하며 쇼비즈니스 업계의 총아로 남고 싶어 했고, 바로 그 점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심슨은 백인들이 다니는 대학을 나와 백인 부자 동네에서 백인 부자 친구들과 어울려 살았다. 그리고 1990년대 흑인들의 울분을 표상하는 뒤틀린 상징이 됐다.
심슨의 무죄, 인종차별에 대한 ‘복수’
이 복잡한 이야기를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심슨이 흑인 커뮤니티를 이용했고, ‘멍청하게’도 커뮤니티가 여기에 동조했다고. 그러나 이것은 오독일 가능성이 크다. 실상은 당대의 흑인 커뮤니티가 심슨을 이용했고, 심슨은 그 동아줄을 붙잡고 간신히 살아남은 그림에 가깝다. 인권 운동가 대니 베이크웰은 〈이에스피엔〉(ESPN) 다큐멘터리에서 “오제이는 우리의 대의를 담는 그릇이었고, 도구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심슨 재판에 9번 배심원으로 참여했던 캐리 베스 역시 같은 다큐에서 무죄 평결은 로드니 킹 사건에 대한 흑인들의 복수였다고 털어놨다.
1997년 손해배상 민사소송에서는 심슨의 혐의가 인정됐다. 이후 심슨은 줄곧 내리막을 걷다가 61살에 강도질을 벌이는 바람에 징역 33년형을 받아 수감됐고, 가석방된 뒤 76살 나이로 죽었다. 그가 떠난 날에는 아무도 그를 애도하지 않았다.
박강수 <한겨레> 기자 turner@hani.co.kr
*스포츠 인(人)사이드는 동서고금 스포츠 선수 관찰기로 4주마다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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