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원혼을 찍었다…4·3항쟁 다큐사진의 새 지평

노형석 기자 2024. 6. 3.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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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계 주목받는 성남훈, 이한구 작가의 신작들
성남훈 작 ‘살아낸 딸들, 북촌리, 조천읍, 제주도, 2020’. ‘살아낸 딸들’ 연작 가운데 일부로 얼굴없는 생존자의 초상을 담았다. 노형석 기자

‘바람이 전하는 말을 보라. 그리고 들어라.’

신들린 사진들이 대신 이야기한다. 학살당한 뒤 얼굴의 기록조차 사라진 옛 원혼의 육성을. 지금 찍는 이의 몸부림이 배어 나오는 사진 인화지의 질감으로.

지난 2019년부터 올해까지 제주 4·3항쟁의 현장을 돌아보고 포착한 다큐사진가 성남훈(61)씨의 근작사진집 ‘서걱이는 바람의 말’(아트레이크 펴냄)이 사진계에 파문을 울리고 있다. 사진집 발간과 함께 지난달 16~26일 서울 화동 전북도립미술관 서울분관에서 열린 같은 제목의 수록작품 전시회를 보고 4·3을 이런 파격으로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동과 충격을 느꼈다는 사진계 인사들 반응이 잇따른다. 작품집에 실린 사진들은 대부분 찢어지고 구멍난 거친 질감의 표면을 공유한다. 그 위로 한결같이 바람소리가 울리고 지나간 제주섬의 근대사 흔적들을 올려놓았다. 올해로 발발 76주년을 맞는 4.3 항쟁의 여러 학살 공간과 비극의 순간들을 위무했던 무당의 굿판, 신당의 제례식, 사자들의 얼굴 없는 모습, 숙연하면서도 초연한 산 자들의 표정이 두루 담겼다.

성남훈 작 ‘바람의 말, 서귀포시, 안덕면, 제주도, 2019’. 4.3항쟁 당시 학살 현장이던 서귀포 정방폭포와 안덕면 큰넓궤에서 포착한 보름달 모습을 적외선 카메라로 각각 찍어 결합시킨 작품이라고 한다. 노형석 기자

프랑스 파리에서 사진 유학을 마치고 지난 20여년간 세계 곳곳 분쟁 현장의 난민들을 집요하게 찍어온 그는 이 사진집에서 스트레이트한 작법을 버렸다. 사진 스스로가 자신의 앵글과 인화지를 잡아 뜯으며 울부짖는 듯한 작품을 찍었다. 작가는 대형 4×5인치 폴라로이드 필름과 대형 카메라를 써서 하루에 불과 서너 컷만 찍은 뒤 당시의 아픔을 기억하고 위로한 현장의 나무나 바위 위에 필름을 밀어 이미지를 파열시켰다고 털어놓았다.

토벌대가 주민들을 밀어 떨어뜨려 처형한 장소인 정방폭포는 적외선 장노출 촬영으로 핏빛 아롱진 폭포 이미지를 구현해냈다. “한장의 사진으로 온전히 재현할 수 없는 역사의 불완전성, 희미해질수록 붙들어 두어야 하는 기억의 소명에 대한 사진의 질문”이라고 작가는 말했다.

70년 넘는 세월의 힘에 묻히고 수구 독재정권의 은폐 책동 속에 흩어져 버려 이젠 냉정한 다큐사진의 객관적 시선으로는 실체의 일말 조차도 찾기 어려운 4·3 희생자들과 학살의 비극적 단면들을 작가는 그렇게 시적으로 풀어내려 했다. 현장으로 지목된 곳과 살아남은 피해자들과 후손들을 포착한 사진을 찍되 형상과 선을 으깨어 항쟁과 학살의 숨은 역사를 죽음이 내재한 사진의 부재증명(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을 통해 말하려 했다. 성 작가는 “우리는 말하지 못했어도, 바람은 말해왔다”는 제주 토박이 도민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 사진의 한줄기 바람의 말이기를 바란다고 사진집 속지에 썼다. 환갑을 지난 작가가 4·3의 기억을 감성적으로 환기하는 파격적 작업 변모를 통해 자기 작업의 전환점을 만들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한구 작가의 사진집 ‘태’에 실린 2015년 작 ‘변산’. 변산반도의 뭍에서 바라본 서해의 유동하는 이미지를 극적으로 잡아냈다. 노형석 기자

최근 사진집 ‘태’(류가헌)를 낸 50대 사진작가 이한구씨의 결실도 주목받고 있다. 지난 2일까지 서울 류가헌에서 수록작품들을 전시한 이씨는 60~70년대 군 생활 물품들을 포착한 ‘군용’ 연작과 20대 산악잡지 기자시절부터 취재해온 산악 사진, 청계천 변의 삶을 담은 연작들로 견고한 다큐작업들의 틀을 유지해온 작가다. 이번 전시는 이런 그간의 여러 작업들을 정리하는 한편으로, 기존 다큐작업의 관성에서 벗어나 긴 호흡과 깊은 시선으로 이 땅 산야와 그 안에서 묵상하고 염원하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담아낸 ‘태’ 연작들을 통해 확연히 농익은 자기만의 정련된 세계를 보여주는 성취를 이뤘다는 평가다.

수록작품들은 즉흥적으로 찍은 것들이 아니라 30년간 이 땅 곳곳을 발품 돌며 돌아다닌 끝에 알게 된 진경들의 면모를 담고 있다. 변산반도의 뭍에서 바라본 서해 바다의 유동하는 이미지를 극적으로 잡아낸 2015년 작 ‘변산’을 비롯해 지리산 노고단의 산그늘 속에서 반야봉을 보며 여명의 시간 기도하는 여인네의 모습이나 저녁 무렵 돌탑과 수행자의 상이 어둠 속에 아롱지는 경북 구미 금오산의 원경, 자신의 수행심을 표현하는 듯 물결치는 구름 아래 바위 턱에서 수행하는 승려의 모습을 담은 관악산 풍광 등이 등장한다.

사람과 자연이 어우러진 풍경의 인문적 사진 도상들을 통해 작가가 말한 ‘우리 땅의 아름다운 가치’와 ‘우리를 균형 있게 할 정신과 정서’의 면모들을 엿볼 수 있다.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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