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호 기자의 열려라! 우리말] 한자어 '백(白)'이 만들어낸 우리말 가지들
제22대 총선에서 참패한 국민의힘이 패배 원인을 분석하는 백서를 만들고 있다. ‘백서(白書)’의 사전적 풀이는 “정부가 정치, 외교, 경제 따위의 각 분야에 대해 현상을 분석하고 미래를 전망하여 그 내용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만든 보고서”다. 교육 백서, 노동 백서, 외교 백서 등 수많은 백서가 있다. 언론보도를 통해 비교적 널리 알려져 있는 ‘백서’는 본래부터 쓰던 우리말은 아니고 영어를 번역해 들어온 말이다.
사람 인(人)과 결합한 백(伯)은 ‘맏이’를 의미
백서란 말은 애초 영국 정부가 특정 사안에 대해 조사한 결과를 의회에 보고하던 책에서 유래했다. 이 보고서의 표지가 하얀색으로 된 데서 일명 ‘white paper’라고 불렀는데, 이를 ‘흰 백(白), 글 서(書)’로 직역한 게 ‘백서’다. 요즘은 좀 더 폭넓게 쓰여 ‘언어의 의미확대’ 현상을 볼 수 있다. 민간 기업이나 연구소, 시민 단체 등에서 특정 주제에 대해 분석한 결과를 내놓을 때도 백서라는 말을 쓰기 때문이다.
백서는 표지색 ‘white’에서 온 말이긴 하지만, 의미적으로도 ‘낱낱이, 명백하게 밝히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한자어 ‘백(白)’이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 ‘희다’라는 뜻으로 많이 쓰이긴 하지만, ‘분명하다/깨끗하다/밝다/빛나다’ 등의 의미를 나타내며 무수한 단어를 파생시켜 우리말을 풍부하게 해준다. 자백, 고백을 비롯해 백미, 백색선전, 백일하, 백주대로, 백병전, 백일장, 백수건달, 백숙, 백안시, 백일몽 등이 모두 그렇게 만들어진 단어다.
한자 白은 글자 유래에 대해 명료하게 밝혀진 게 없이 여러 설이 분분하다. 촛불의 불꽃이라거나 엄지손톱을 그린 것이라는 해석이 유력하다. 껍질을 벗긴 쌀 또는 태양(日)이 뜰 때 비추는 햇빛으로 보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엄지손톱이 있는 엄지손가락은 ‘으뜸’ ‘첫째’를 의미한다. 그래서 ‘사람 인(人)’과 결합해 ‘백(伯)’을 이루는데, 이것은 ‘맏이’를 뜻한다. 큰아버지를 뜻하는 ‘백부(伯父)’가 그렇게 만들어졌다. 백부란 아버지의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는 형을 이르는 말이다.
‘주인백’은 “주인이 말씀드립니다”를 의미
이에 비해 ‘중부(仲父)’는 아버지의 형제 가운데 둘째 되는 사람을 가리킨다. ‘중(仲)’은 ‘버금, 중간’이란 뜻을 가진 글자다. 많은 것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 첫째가는 것이 ‘으뜸’이고, 으뜸의 바로 아래가 ‘버금’이다. “실력이 그에 버금간다”라고 하면 그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그 다음간다는 뜻이다.
이보다 좀 널리 쓰이는 말이 ‘숙부(叔父)’다. ‘숙(叔)’은 아저씨를 뜻하는 말이다. 아버지의 남동생, 즉 작은아버지를 가리킨다. ‘아재비’라고도 하는데, 이는 아저씨의 낮춤말이다. 백부는 큰아버지, 숙부는 작은아버지라고 알고 있으면 편하다.
중부는 요즘 잘 안 쓰이지만 ‘백중세’ 또는 ‘백중지세’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백중(伯仲)’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맏이와 둘째를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여기서 의미가 확장해 재주나 실력 등이 서로 비슷해 낫고 못함이 없음, 또는 그런 형세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 ‘난형난제’와 같은 말이다. “서로 실력이 백중하다”란 말은 거기서 나왔다.
토지 중에서 도로와 접한 부분이 없어 투자가치가 없는 땅을 ‘맹지(盲地)’라고 한다. 이와 비슷하게 농사가 안 되어 거둬들일 것이 없는 땅을 가리켜 ‘백지(白地)’라고 한다. 이것이 의미가 확대돼 ‘정해진 근거가 없는 상태’를 뜻하는 말이 됐다. 여기서 ‘백지어음, 백지수표’ 같은 말이 파생되었다. 이는 발행인이 어음이나 수표에 서명만 하고 그 밖의 요건은 나중에 소지인이 써넣을 수 있도록 비워둔 것을 말한다. ‘백지위임(白紙委任)’이라고 하면 조건을 붙이지 않고 모든 것을 맡긴다는 뜻이다.
‘자백(自白), 고백(告白), 독백(獨白), 명백(明白)’ 할 때도 ‘白’이 쓰였다. 이때의 ‘백’은 ‘숨김없이 드러내다’를 뜻하는 말이다. 관리소장백, 주인백 할 때도 같은 ‘白’ 자를 사용한다. 이때의 ‘-백(白)’은 (말하는 사람의 이름 뒤에 붙어) ‘말씀드리다’라는 뜻을 더하는 접미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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