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고문’도 ‘사이다’도 없는 드라마들…이게 현실이라고

남지은 기자 2024. 6. 3. 15:1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더 에이트 쇼’ ‘졸업’ ‘나는 대놓고…’ 등
계층 이동 사다리 붕괴된 사회 조명
계층 이동 사다리가 붕괴된 현실을 보여주는 넷플릭스 드라마 ‘더 에이트 쇼’. 넷플릭스 제공

“아무리 잘살려고 노력한들 소용 있을까요. 이놈의 세상.” 지난달 17일 공개된 넷플릭스 드라마 ‘더 에이트 쇼’는 극 중 ‘3층님’(류준열)의 대사로 현실을 이렇게 결론짓는다. 우리는 모두 태어난 대로, 처음에 주어진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밑바닥 인생’을 상징했던 ‘1층님’(배성우)도 인생을 바꾸려고 발버둥 쳤지만 결국 “저 같은 게 (신분 상승을) 욕심내면 안 되는 거였다”를 ‘깨닫고’ 죽음을 맞는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더 에이트 쇼’는 성장의 사다리가 사라지고, 대신 어떤 수저를 물고 태어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지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드라마가 ‘자본주의 계급사회’의 민낯을 더욱 노골적으로 비추고 있다. 2022년 ‘금수저’(MBC) 등 수저계급론에 기반을 둔 드라마들이 돈보다 중요한 건 많다는 희망적인 결론에 도달했다면, 이제는 흙수저는 금수저가 될 수 없는 사실을 직시하라고 얘기한다.

‘더 에이트 쇼’가 대표적이다. 내용 자체가 계층 이동 사다리가 붕괴하면서 생존 경쟁이 일상화된 현실의 축소판이다. 누군가 지켜보는 고립된 공간에서 ‘시간이 쌓이면 돈을 버는’ 게임 쇼에 참여한 8명은 게임 전 선택한 숫자로 그곳에서의 삶의 방향이 결정된다. 8층님(천우희)은 펜트하우스 같은 공간에서 여유롭게 지내고, 1층님은 좁고 낡은 방에서 심지어 오물과 함께 살게 된다. 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층마다 분당 쌓이는 참가비도 다르다. 그렇게 누적된 자산 규모에 따라 참여자 간 갑을 관계가 형성되고 균열과 갈등이 생긴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는 “선택한 숫자에 의해 보상금 규모가 결정되는 규칙부터 자수성가가 원천봉쇄된 현실을 보여준다”며 “ 금융자산이 없으면 경제적 약자의 처지를 벗어날 수 없는 한국 자본주의의 폐해가 ‘더 에이트 쇼’같은 드라마에 관심을 두게 한다”고 했다.

‘밑바닥 인생’을 상징했던 1층님(배성우)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려고 발버둥 쳤지만 결국 잔혹한 현실을 맞는다.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 ‘졸업’은 멜로물인데도 “외곽으로 밀려나기 싫다”며 대치동 학원 강사가 된 이준호(위하준)를 통해 청년 세대의 현실을 보여준다. 티브이엔 제공

특히 20~30대 청년 세대가 겪는 자괴감에 주목한 드라마가 늘었다. 지난해 12월 발표한 한국은행 경제연구원 조사(20~39살 2천명 대상)를 보면, 청년 10명 중 7명(67.8%)은 개인 노력에 의한 계층 이동 가능성은 적다고 답했다. 이런 현실은 지난달 11일 시작한 멜로드라마 ‘졸업’(tvN)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극중 이준호(위하준)가 대기업을 그만두고 대치동 학원 강사가 된 이유는 “언제 외곽으로 밀려날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이다. 그는 반대하는 아버지한테 “매달 수천만원 꽂히는 통장과 강남 신축 아파트 계약서 들고 돌아오겠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는 시대를 잘 타고나셨잖아요. (아이엠에프 때 대치동 아파트 주워 든) 덕분에 우리 가족 대치동 원주민 행세하면서 잘살았지만 우리는(삼형제) 평범하게 회사 다녀서는 외곽으로 밀려나는 일만 남아요. 저 진짜 그러고 싶지 않아요.”

‘나는 대놓고 신데렐라를 꿈꾼다’는 신재림(표예진)을 통해 금수저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인생을 바꿀 방법은 백마 탄 왕자를 만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티빙 제공
‘비밀은 없어’ 송기백(고경표)은 이미지 메이킹도 사회적 호신술이라며 금수저인 척한다. 제이티비시 제공

이런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해 부모 잘 만나는 ‘랜덤 게임’에서 진 이들에게 다양한 탈출 방법을 제시하는 드라마도 등장했다. 티빙이 지난달 31일 공개한 ‘나는 대놓고 신데렐라를 꿈꾼다’는 금수저가 아니라면 결혼 상대를 잘 고르는 것이 현실을 변화시키는 방법이라고 말한다. 극중 신재림(표예진)은 백마 탄 왕자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사교클럽 매니저로 취업한다. 그의 아버지가 남긴 유언도 “이 세상 어차피 네 힘으로 성공 못 하니 그곳(사교클럽)에 가서 부자 남편 만나 팔자 펴라”다. 지난달 1일 시작한 ‘비밀은 없어’(JTBC)에서 송기백(고경표)도 아나운서로 성공하려고 모든 걸 다 가진 금수저인 척한다. “이미지 메이킹은 사회적 호신술”이기 때문이다. ‘나는 대놓고…’의 크리에이터 백미경 작가는 지난달 29일 제작발표회에서 “백마 탄 왕자는 자신의 삶에 차선을 변경할 수 있는 여러 기회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드라마들은 열심히 하면 달라질 수 있다는 ‘희망 고문’을 하지 않는다. 대신 현실을 아프지만 있는 그대로 보여주며 그래서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만든다. 시청자들은 행복하지 않은 결말에 “화도 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회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며 공감하고,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살라는 의미 같다”며 메시지를 곱씹기도 한다. ‘더 에이트 쇼’ 한재림 감독은 지난달 22일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을) 무너뜨리는 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사이다 같은 결말로 대리만족을 느끼게 하면 이 드라마의 주제인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윤석진 교수는 “연애·범죄물과 달리 계층 간 사다리 문제에서 어설픈 통쾌감은 현실을 더욱 씁쓸하게 만들 수 있어서 있는 그대로를 명확하게 인식하게 하며 앞으로를 고민하게 만드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짚었다.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