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리더] 여소야대 정국 속 대만 총통 취임한 라이칭더 | “대만은 세계 지탱하는 반도체 국가…양안 관계 ‘현상유지’ 할 것”
“중화민국(대만)과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은 서로 예속되지 않는다. 양안(兩岸·중국과 대만)의 미래는 세계 정세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새 정부는 평화의 조타수로서 ‘네 가지 견지(四堅持)’를 지키며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게 현상을 유지하겠다.”
5월 20일 제16대 대만 총통에 취임한 라이칭더(賴淸德)는 4년 임기를 시작하는 취임식에서 자신의 집권 기조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민진당 출신 라이 총통의 네 가지 견지는 ① 자유민주적 헌정 체제, ② 대만과 중국 간상호 종속 불가, ③ 대만과 중국 간 상호 주권 침해 및 합병 불가, ④ 대만 국민 뜻에 따른 미래 결정을 말한다. 이는 2021년 대만 건국 기념일 행사에서 차이잉원(蔡英文) 전임 총통이 밝힌 대만의 노선이다.
이날 취임사에서 많이 언급된 키워드는 ‘대만’과 ‘세계’였다. 라이 총통은 취임식에서 대만을 87차례, 세계를 42차례 언급했다. 전임 차이 총통이 4년 전 취임사에서 대만을 47회, 세계를 11회 언급한 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 라이 총통은 대만이 세계를 지탱하는 반도체 산업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이날 라이 총통은 취임 연설 중 “대만이 주권 독립국가”라면서 중국이 금기시하는 ‘독립’이라는 단어를 한 번 언급했다. 이는 1947년 제정된 대만 헌법 1장에 나온 문구를 낭독한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중국을 향해 “대만에 대한 정치·군사적 위협을 멈추라”고 촉구했다.
여소야대 정국에 발목 잡힌 라이 총통
5월 17일 대만 제1 야당인 국민당과 제2 야당인 민중당이 함께 내놓은 ‘5대 국회 개혁 법안(국회의 정부 견제 기능을 강화한 내용)’ 을 여당인 민진당이 저지하는 과정에서 난투극이 벌어져, 입법위원(국회의원) 6명이 병원에 실려 가는 일이 벌어졌다. 라이 총통 취임 하루 뒤인 5월 21일에도 야당 의원들이 법안 통과를 위해 새벽부터 의회 의사당 주위를 에워쌌고, 본회의장 연단을 점거했다. 이는 라이 총통이 풀어야 할 대만의 여소야대 정국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1월 13일 치러진 대만 총통·입법위원 선거에서 민진당의 라이칭더가 40.05%의 득표율로 총통에 당선됐지만, 입법위원 선거에선 민진당이 과반을 차지하지 못해 여소야대 정국이 만들어졌다. 세부적으로 보면 친중 성향인 국민당이 52석을, 라이 총통을 배출한 민진당이 51석을, 중도 성향인 민중당이 8석을, 무소속이 2석을 각각 차지했다.
대만 독립 성향이 강한 민진당이 3연속 정권 재창출에 성공해 대만이 반중·친미 기조를 유지하게 됐지만, 중국의 군사·경제적 압박은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들어진 여소야대 정국은 라이 총통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이다. 라이 총통의 득표율이 과반을 달성하지 못한 점도 약점으로 꼽힌다. 총자이안 싱가포르국립대 정치학 교수는 “중국 정부는 라이칭더의 득표율이 40%에 불과했던 만큼 취임 후에도 기반이 약하다고 판단, 취임 전후로 상당한 압력을 대만에 가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반도체는 대만의 자부심…AI 섬으로 발전
이날 라이 총통은 대만 5대 핵심 산업으로 반도체, 인공지능(AI), 군사, 보안, 차세대 통신을 꼽았다. 그는 “대만은 반도체 선진 제조 기술을 장악해 AI 혁명의 중심에 서 있다”면서 “대만을 실리콘(반도체) 섬에서 AI 섬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고 했다. 이러한 산업 육성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기 위해 라이 총통은 TSMC의 소재·장비 납품 협력사인 톱코그룹의 궈즈후이 회장을 경제부 장관으로 지명했다. 이로 인해 라이 총통이 후보 시절 공약한 ‘대만판 실리콘밸리’ 구축에도 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대만 정부는 지난 2월 타오위안·신주·먀오리 대(大)실리콘밸리 계획을 승인했다. 약 1600만㎡ 규모의 과학 단지용 대지를 확보하고, 2027년까지 20조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이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 TSMC를 중심으로 한 반도체 생태계를 강화하기 위해서다. TSMC는 최근 AI 반도체의 핵심으로 떠오른 차세대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직접 생산하겠다고 밝혀, HBM 시장 1위인 한국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향후 세계적인 팹리스(반도체 설계 회사)들의 연구개발(R&D) 센터가 들어서면 산업 시너지 효과도 커질 전망이다. 현재 AI 반도체 핵심인 GPU 시장점유율 1위 업체인 엔비디아는 약 1조원을 투입해 대만에 ‘AI 혁신 연구개발(R&D) 센터’를 건설 중이다. 대만 정부도 R&D 센터 구축에 약 2800억원을 지원한다. 반도체 장비 1위 기업(시가총액 기준)인 네덜란드 ASML도 1조2000억원을 들여 TSMC의 과학단지가 있는 신주에 제조 공장과 연구센터를 짓고 있다. 최근 대만연합신문망 보도에 따르면 AMD도 대만에 AI R&D 센터를 설립하기 위해 대만 경제부에 이와 관련한 신청 서류를 제출했다.
Plus Point
라이칭더 대만 총통 취임 후 中 반응 “ 대만 독립은 죽음의 길”…군사훈련도라이칭더 신임 대만 총통이 취임한 5월 20일 행한 연설에 대해 중국 외교부는 ‘대만 독립은 죽음의 길’ 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왕이(王毅) 외교부장(장관)은 “(라이칭더의) 독립 주장은 대만해협의 현상 유지에 가장 위험한 변화”라고 평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는 5월 21일 신문에 ‘대만 독립 일꾼의 공수표가 나라를 팔아먹고 대만에 화를 부른다’는 제목의 칼럼을 게재했다. 공수표는 라이 총통의 취임 연설을, 대만 독립 일꾼은 라이 총통을 뜻한다.
중국 외교부는 5월 22일 주중(駐中) 한국·일본 공사를 불러 양국 정치인들의 라이 총통 취임식 참석에 대해 항의했다. 한국은 한국·대만 의원 친선협회장인 조경태(국민의힘) 의원이 참석했고, 일본은 31명의 여야 의원이 취임식에 참석해, 라이 총통과 별도 면담 시간을 가졌다.
중국 인민해방군 동부전구는 5월 23일 대만을 포위하는 군사훈련에 돌입했다. 중국이 대만 주변을 포위하는 군사훈련을 한 건 라이 총통이 미국을 방문했던 2023년 8월 이후 9개월 만이다. 리시 동부전구 대변인은 “독립을 추구하는 대만 독립 세력에 대한 강력한 징계이고 외부 세력의 간섭·도발에 대한 엄중한 경고”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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