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21세기 석유’ 구리 선점 경쟁 가열] 전기차·AI 시장 커지며 구리 수요 급증…광산 투자·M&A 가속
미국과 중국이 구리 확보전에 돌입했다. ‘21세기 석유’라고 불리는 구리는 전기차는 물론 인공지능(AI) 산업 필수 인프라인 데이터센터에 들어간다. 또한 재생에너지로 생산된 전기를 다루는 전력망에 구리가 쓰이는 등 친환경 산업 확대로 수요가 늘었다. 하지만 구리 광산 개발이 난항을 겪으면서 구리 공급이 수요를 맞추지 못하고 있다. 이에 구리 확보를 위한 광산 개발 경쟁이 불붙었다.
5월 14일(이하 현지 시각)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소식통을 인용해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최대 30억달러(약 4조1409억원) 규모인 잠비아 광산 지분 인수와 관련해 투자자들과 논의를 시작했다”며 “목표는 중국이 중요 금속과 광물의 글로벌 공급을 장악하는 것을 막는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미국은 2023년에도 잠비아에서 아랍에미리트(UAE)가 모파니 구리 광산에 대한 투자를 고려할 것을 촉구했다”고 했다.
미국에는 광업부, 국부 펀드 등이 없다. 이런 환경은 국영기업에 막대한 투자를 지시할 수 있는 중국과 경쟁에서 불리하다. WSJ는 “미 정부가 국가 안보 프로젝트에 직접 투입할 수 있는 자금은 제한돼 있다”며 “국내외 민간 기업은 물론 국부 펀드를 보유한 우호국과 협력해 그들의 국익에 도움이 되는 자산에 투자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일례로 미국은 2023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손잡고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리튬 및 코발트 확보에 나섰다. 사우디는 광산 지분을 갖고 미국 기업은 광산 채굴권 일부를 보장받는 구조였다.
미국은 지난 수년간 친환경 산업 성장이 가속하자 원자재 시장에서 중요성이 커지고 있는 구리 확보에 나섰다. 그 중심에는 해외 프로젝트 자금 조달을 돕는 연방 기관인 국제개발금융공사가 있다. 이 기관은 2023년 광산 부문에만 7억4000만달러(약 1조214억원)를 투자했다. 이는 기존 광산 프로젝트에 투자한 2억4500만달러(약 3382억원)보다 두 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현재 미국은 파키스탄에 있는 구리 광산에도 수십억달러를 투자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아일랜드의 테크멧(TechMet)이라는 회사는 미국의 대표적인 투자처 중 하나다. 도널드 트럼프 전임 정부와 바이든 정부는 국제개발금융공사를 통해 테크멧에 약 1억500만달러(약 1449억원)를 투자해 2대 주주가 됐다. 테크멧은 리튬, 코발트, 니켈, 희토류 채굴 업체의 지분을 소유한 기업이다. 남아프리카 출신인 테크멧의 최고경영자(CEO) 브라이언 메넬은 “우리는 제2의 냉전을 겪고 있다”며 “서구의 가치관과 독재 간 경쟁에서 나는 단 한 순간의 의심도 없었다”고 했다.
중국은 정부의 지원하에 빠르게 광산 투자를 늘리는 중이다. 상하이 푸단대 녹색금융개발센터에 따르면 중국은 브라질이나 호주를 제외한 일대일로(一带一路, 육⋅해상 실크로드) 국가를 대상으로, 2023년 금속 및 광산 투자에 190억달러(약 26조2257억원) 이상을 지출했다. 이는 2022년보다 158% 증가한 수치이자 2013년 이후 최고 수준이다.
중국은 콩고에서 코발트 및 구리 광산을 개발하고 있는 광산 기업 셰마프(Chemaf)를 인수하기 위한 사전 협상에 들어갔다. 셰마프는 콩고의 모든 자원을 관리하는 국영기업 제카마인스(Gecamines)의 개발 대행사다. 칠레 북부에서 구리와 코발트 사업을 운영하는 미국 기업을 포함해 최소 두 곳의 서방 기업 역시 셰마프 인수에 관심을 보이면서 중국과 경쟁하고 있다.
친환경 산업 확대→구리 수요 증가
이처럼 구리 확보전이 벌어진 것은 전기차 보급 확산, AI 산업 등으로 구리 수요가 늘었기 때문이다. 골드만삭스의 제프 커리(Jeff Currie) 원자재 리서치 글로벌 수석은 2023년 9월 CNBC와 인터뷰에서 구리가 석유만큼이나 중요한 원자재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골드만삭스는 2040년 친환경 목적으로 사용되는 구리의 양이 2023년 대비 47% 늘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재생에너지원에서 생산된 전기를 다룰 수 있는 전력망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구리 배선이 필요하다. 또한 넓은 지역에 걸쳐 있는 태양광 및 풍력발전소는 중앙 집중식 석탄 및 가스 발전소보다 생산된 전력 단위당 더 많은 구리를 필요로 한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해상 풍력발전소의 경우 메가와트(㎿)당 8000㎏의 구리가 사용되며, 태양광은 2822㎏의 구리가 필요하다. 이는 석탄 발전(㎿당 1150㎏) 대비 2~8배가량 더 많은 구리가 소요된다는 뜻이다.
전기차에도 구리가 대량으로 쓰인다. 내연기관 자동차에 비해 모터와 배터리가 많이 사용되는 전기차 제조에는 한 대당 평균 83㎏의 구리가 사용된다. 내연기관 자동차(21.8㎏)의 3.8배에 달하는 양이다. 포천 비즈니스 인사이트는 미국 전기자동차 시장이 2028년 연평균 25.4% 성장할 것으로 전망했다.
AI 산업에도 구리가 필수다. AI가 작동하기 위해선 데이터센터가 필요하고, 이를 작동시키는 전선에 구리가 들어간다. 미국 구리개발협회(CDA)에 따르면 데이터센터를 구축할 때 1㎿당 27t의 구리가 들어간다. 구리는 은에 이어 두 번째로 전도성이 높은 금속이다. 구리 가격이 상승하면서 알루미늄 등 더 저렴한 금속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경우 효율성이 떨어진다.
미국 지질조사국에 따르면 전 세계 구리 매장량은 28억t 규모다. 2022년 기준, 전 세계 구리 광산의 연간 생산능력은 2700만t이며, 제련 생산능력은 3100만t이다. 구리는 태평양 연안을 따라 주로 매장돼 있으며 칠레, 페루, 미국 애리조나주 등에서 주요 채굴 회사가 광산을 개발 중이다.
문제는 많은 광산 개발사가 구리를 채굴, 제련하고 있지만 구리 재고량은 갈수록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런던금속거래소에 따르면, 구리 재고량은 2013년 최대치 67만8000t을 기록한 이후 지속해서 감소했다. 2023년 재고 최대치는 10만7000t에 불과했고, 최저치는 5만1000t이었다. 구리 재고량이 급감한 것은 급증하는 수요를 공급이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리는 전 세계 매장량의 약 12%만 채굴됐다. 매장량이 많기에 광산을 추가로 개발하면 공급이 늘 수 있다. 하지만 신규 개발이 쉽지 않다. 일례로 북미 최대 구리 매장지인 알래스카주 페블(Pebble) 광산은 노던 다이너스티 미네랄(Northern Dynasty Minerals)이 타당성 검토를 마치고 2018년에 건축 승인 심사(인허가)를 제출했다. 그러나 미 환경청은 광산 인근 어장 훼손, 환경오염 등의 이유로 승인을 거부했다.
채굴 중인 광산에서 생산에 차질을 빚는 경우도 있다. 파나마의 코브레 파나마(Cobre Panama) 광산은 환경 훼손과 지역 주민의 건강에 대한 우려로 폐쇄를 요구하는 시민의 시위가 지속돼 왔다. 이 와중에 파나마 법원은 2023년 11월 앞으로 20년간 이 광산의 채굴 및 광물 판매권을 보장받은 퍼스터 퀀텀 미네랄(First Quantum Minerals)이 받은 채굴권은 불법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 코브레 파나마 광산은 폐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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