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도의 음악기행 <83> 연주자의 친절하지 않은 영원한 동반자, 미스터치] AI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미 있는 따뜻한 연주
강박이 있는 완벽한 연주보다는 미스터치가 많은 감동적인 연주를, 좌충우돌하지만
그 안에 인간미 물씬 나는 따뜻한 삶을 살길 스스로에게 바라본다. 그러면서 오늘도 온 정성과 마음을 담아
미스터치를 연주하며 관객에게 필자의 진심을 전하겠다.
출근길 흔들리는 버스 창밖으로 맑은 햇살이 눈부시게 부서지고 있다. 간밤의 몰아친 폭우가 무색한 듯 오늘 아침 하늘은 더없이 맑고 상냥하다. 집에서 여유 있게 나온 터라 학교를 두 정거장 앞에 두고 버스에서 내렸다. 봄 날씨를 만끽하며 천천히 걷는다. 갑자기 옆에서 굉음을 내며 달리는 오토바이도, 담벼락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흉물스러운 낙서도, 간혹 길 위에 지저분하게 널린 담배꽁초도 봄날을 만끽하는 필자의 마음을 해치지 못하는 것 같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핸드폰 플레이 리스트에 저장된 음원을 듣는다. 늘 그렇듯 필자가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인 알프레드 코르토, 빌헬름 켐프, 블라디미르 호로비츠가 남긴 음원이다. 오래된 책의 종이 냄새가 풍기는 듯한 LP 음원 특유의 음질과 함께 옛 연주가들의 명연주를 감상하다 보면 이들 연주의 공통점이 보인다. 바로 ‘미스터치’가 꽤 많다는 것이다. 물론 미스터치가 있다는 이유로 그들의 연주를 깎아내릴의도는 전혀 없다. 오히려 필자는 이 미스터치를 따라 하고 싶을 정도로 그들의 예술을 깊이 사랑하니까 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미스터치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닌, 음악의 음이 시작하자마자 필자의 심장이 그들 손끝에 매달린 것 같은 예술적인 표현력이 감동적이다. 그렇기에 연주에서 들리는 미스터치는 언급할 가치가 없는 것 또한 그들의 공통점이라고 생각한다. 플레이 리스트 곡목이 거의 끝에 다다를 때쯤, 필자가 근무하는 음악대학 연구실에 도착했다. 곧 학생이 수업받으러 들어온다. 오늘은 과제 곡으로 쇼팽의 한 작품을 준비해 왔단다. 밖의 선선한 날씨가 무색할 정도로 땀을 뻘뻘 흘리며 열정을 다해 건반에 자신의 감정을 쏟아 넣으려 애쓴다. 피아노 선생으로서 이런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학생의 연주가 끝나고 수업이 이어진다. 음악적인 해석과 기술적인 어려움에 관해 토론한다. 필자도 아무리 전문 연주자고, 선생이라지만 종종 어려움에 부딪히는 순간이 있다. 바로 지금도 그런 순간이다. 정열적으로 감정이 몰아치는 부분에서 학생도 마음을 다해 연주해, 듣기에 감동적이지만 그로 인해 힘 조절이 어려워 미스터치가 종종 발생하기 때문이다. 감상하기에 무리는 없다지만 이 학생이 외부 콩쿠르나 오디션에 참가한다면 혹시라도 이런 미스터치로 인해 비평받지 않을까 걱정됐다. 그럼, 학생에게 조금 느리고 차분히 연주해서 미스터치 발생 가능성을 줄이라고 가르쳐 줘야 할까. 마음속에서 수백 번은 갈등하며 고민하다 필자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 좋아. 더 틀려도 좋으니 이렇게 마음을 다해 연주하렴. 그렇다고 너무 많이 틀리지는 말고(웃음).”
미스터치는 연주자에게 있어 어둠 속의 동반자처럼 늘 따라다니는 불편한 존재다. 필자 역시 지금도 무대에서 연주하는 동안 숨막힐 듯이 어려운 부분이 등장할 때 심장이 마구 쿵쾅거리든지 아니면 ‘제발 이번만’이라고 속으로 간절히 외치며 치기도 한다. 그럼에도 미스터치는 야속하게도 음악에서 자신의 존재를 여실히 드러내기도 한다.
그럼, 이 미스터치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영어 단어 mistouch를 직역하면 ‘올바르지 않은 접촉’ 정도로 말할 수 있겠다. 음악에서는 작곡가가 악보에 기입한 음과 다른 음을 실수로 연주할 때를 뜻한다. 연주할 때 실수가 잦으면 감상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다. 작곡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화성과 음 배열의 조화가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든 음을 실수 없이 연주하는 것이 작곡가의 의도를 올바르게 전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필자는 단호히 ‘아니오’라고 대답한다. 만약 이 질문의 대답이 ‘예’라면 이미 인공지능(AI)으로 대변하는 첨단 기술이 실수 하나 없는, 기술적으로 완벽한 연주를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참이라면 인간의 불완전한 연주는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AI 같은 첨단 기술이 없던 과거에 살던 음악가들도 이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일례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틀린 음을 연주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열정 없는 연주는 용서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또 구스타프 말러도 “음악에서 가장 최상의 것은 악보에 적혀있지 않다”라고 언급했다. 따라서 이들이 말한 내용의 뜻을 생각해 본다면 음 자체가 곧 참된 음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말러가 언급한 악보에 적혀있지 않은 최상의 무언가가 베토벤이 언급한 연주자의 열정과 함께 작곡가가 지시한 ‘음’ 을 통해 전달될 때 음악은 자신의 소명을 다한 것이 아닐까. 다시 말해 악보에 적힌 음은 인간의 마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과 도구일 뿐 우리의 마음 그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란 뜻이다. 하지만 종종 고난도의 기술적 어려움 때문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시간과 마음을 쏟다 보면 미스터치 없는 음만 누르는 행위가 음악 연주의 본질이 되어버리는 오류에 필자를 포함한 많은 이가 빠지곤 한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살아남아야 하는 현대인에게 있어 완벽은 꿈속에나 등장할 법한 관념적인 단어가 아닌 삶의 한가운데 자리한 단어가 아닌가 싶다. 단 몇 문제, 몇 점 차이로 시험의 당락이 결정되고, 이것이 앞으로의 인생에 영향을 준다고 믿으며 살았고, 사회생활에도 매사에 빈틈없이 완벽해야 한다는 말이 하루에도 몇 번 귓가를 스친다. 조금이라도 실수해서 경쟁에서 도태된다면, 당장이라도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것 같다는 위기감이 감도는 뉴스도 거의 매일 접한다. 이런 분위기에서 성장했고 삶을 살아가는 필자의 이런 ‘완벽’에 대한 강박이 혹여나 필자의 연주에도 있는 것 아닐까 하고 스스로 돌아본다. 강박이 있는 완벽한 연주보다는 미스터치가 많은 감동적인 연주를, 좌충우돌하지만 그 안에 인간미 물씬 나는 따뜻한 삶을 살길 스스로에게 바라본다. 그러면서 오늘도 온 정성과 마음을 담아 미스터치를 연주하며 관객에게 필자의 진심을 전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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