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부 교수의 지리로그] 함안의 추억, 1960년대 경남을 보다
필자는 1960년부터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경남 함안에서 성장했다. 먼저 칠원면에 살았다. 칠원은 가야읍의 동쪽에 있는 면으로 칠원, 칠북, 칠서면을 합하여 삼칠면이라고 했다. 조선시대 삼칠면은 칠원현으로 함안군과 분리된 행정구역이었다.
참고로 칠원현은 현재의 마산 남쪽의 땅을 월경지로 가졌다. 칠원초등학교 때 우리나라 경제 사정이 열악해 교실에는 책걸상 없이 엎드려서 공부를 했다. 당시를 기억하면 한국의 발전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 있다. 1960년대 어린시절 생활의 거의 모두는 함안군 가야읍에서 이루어졌다. 가야 지명은 함안 외에도 많다. 삼한과 가야 시대 역사로 부산, 창원, 창녕, 고령, 고성 등에 가야 지명이 남아있다. 가야 말이산 고분군은 함안의 대표적인 유적이다. 당시는 말산리로 불렀다. 필자의 집도 말산리에 속했다.
당시 우리 국민 대부분이 그리 넉넉하지 못했다. 미국의 구호물자로 강냉이(옥수수)가 배급됐고, 학교에서는 점심 도시락 못싸는 힘든 학생들에게 강냉이죽 혹은 강냉이빵을 주었다. 개교기념일에는 학교 잔치를 열고 전교생에게 강냉이빵을 나누어주었다. 당시는 즐거운 축제였다. 여름철 논 잡초 피 뽑기, 메뚜기 잡기, 추수 후 이삭줍기 등으로 어린 학생들도 지역경제에 나름으로 기여했다.
과거 조선시대의 함안의 중심지는 현재의 함안면이었지만, 일제강점기 철도가 가야면을 지나면서 가야면이 성장하고 6·25전쟁 이후 군청과 경찰서 등 주요 군 단위 관공서가 가야로 옮겨왔다. 당시 함안면민들은 함안면을 여전히 함안읍이 불렀다. 그러나 당시 가야나 함안은 모두 읍이 아니고 면이었다.
함안면은 함안에서 가장 높은 남쪽의 여항산 쪽으로 들어가 있어 고도가 약간 높다. 이곳에는 조선시대의 중심지답게 함안의 향교가 위치한다. 우리 마을 뒤편 언덕에 아름다운 성당이 있었다. 동네 아이들도 더러 놀러 가던 곳이었다. 성당의 분위기대로 조용히 놀다 왔다. 1960년인가 함안에서 처음으로 성당에서 유치원을 만들어 초등학교 가기 전 어린이들이 즐겁게 다닌 것 같다. 이미 초등학교에 들어간 필자는 못다녔다.
조선시대에 가야면은 함안면에 비해 저습지가 많아서 살기 힘든 곳이었다. 가야면은 남강의 지류인 함안천을 끼고 있고, 칠원면은 낙동강의 지류인 광려천을 끼고 있다. 함안군 남쪽의 함안면과 여항면은 상대적으로 높은 산지 지역에 위치한다. 함안천의 상류나 중류의 자갈하상과 모래하상은 물이 깨끗해 멱을 감고, 물고기도 잡았다.
작은 웅덩이에는 독풀을 풀어 물고기를 기절시켜 잡기도 했고, 어른들은 낚시나 그물을 이용해 잡았다. 어른들은 잡은 고기를 더러 그 자리에서 회를 쳐 먹기도 했는데, 디스토마에 걸리는 경우도 많았다. 늪지대의 뻘이 조금 말라 물렁해지면 학교 미술시간에 공작용으로 사용했다. 더하여 함안에는 철광석, 구리, 고령토 등 광산이 발달했다. 1971년 국가 광산 생산 실적표를 보면, 동광으로 국내 1위가 함안 군북으로 생산량이 5551t이고 고령토는 법수가 국내 4위로 생산량은 7850t이었다.
함안의 그 넓은 습지대는 마을과 농경지 확장과 도로건설 등으로 개발되면서 제방, 배수로, 배수장, 유수지 등 관리시설이 많았다. 특히 남강이 잘 범람하므로 매우 많은 제방을 지니고 있다. 남강 수위가 올라가면 함안들의 물은 빠져나갈 길이 없이 흥건히 잠긴다. 또한 집중호우가 오면 제방이 터질까봐 걱정이 많았고, 더러 제방이 터지곤 하여 농경지가 물바다가 되기도 했다.
공식 국가 지도에도 ‘한바다’라는 지명이 있다. 원래 넓은 밭인 ‘한밭’인데 가끔 한바다로 불리면서, 홍수가 되면 그대로 바닷물의 한바다가 되어 말산리에서 검암리까지 나룻배도 다녔다. 함안은 당연히 많은 둑방을 건설하면서 현재 총길이가 338㎞에 달한다. 시군 단위로 전국 최고일 것이다. 남강, 낙동강변은 물론, 함안천, 신음천, 검암천 등 크고 작은 거의 모든 하천에 둑방을 조성했다. 특히 법수면 악양 둑방길은 꽃길을 조성해 전국적인 관광지로 알려져 있다. 이제는 남강댐이 범람하게 되면 인공수로인 가화천을 통해서 사천만으로 직접 물을 빼 홍수 피해가 거의 사라졌다.
농사가 불리한 평지에서는 소와 말, 염소 등의 목장으로 이용되었다. 지도에는 ‘마구들’이 나온다. 방목장이다. 당시 60년대 중반 우유 없던 시절 염소유가 공급되었다. 고급 음료였다. 가야 충무동에서 도항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방목고개라 했다. 지금도 방목1길 등 도로주소로 남아 있다. 1960년대 기억에 방목이 들어간 상호가 더러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함안의 승마공원도 이와 연관이 있을 것이다. 저습지가 많으니, 쌀농사 외에 연뿌리, 미나리 농사도 많았다.
마름이라하여 물에서 건져올려 삶으면 밤 같은 맛이 나는 물 속 열매도 있었다. 함안에서도 강화와 같은 화문석을 만들었다. 고급 바닥 깔개였다. 골, 큰 것은 왕골이라 하여 삼각형의 줄기를 가지는 습지형 줄기 식물로서 껍질을 벗겨서 흰 속살를 말려서 방석 등 다양한 화문석을 만들었다. 강가의 모래 땅에는 땅콩도 심었다. 지금 보면 소규모이지만 참으로 다양한 작물들을 재배했다. 함안은 남쪽이라 이모작이 가능했다. 겨울과 봄에는 보리농사가 성했다.
당시 영남의 보리는 겉보리라 하여 껍질이 매우 단단한 보리로서 매우 껄끄러운 보리밥으로 만들어졌다. 보리밥도 건너띄는 사람들도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면 서릿발이 끼이지 않도록 학생들이 단체로 보리밟기에 동원됐다. 일렬로 기차놀이 하듯이 밟고 나갔다. 봄철 보리를 수확하고 나서 바로 물 대고 쌀농사 모내기를 했다. 보리밥이 너무 잦아 질린다 싶으면 보리 대신에 콩나물, 무, 고구마, 감자 등을 혼합하기도 했다. 함안을 포함한 전국적인 현상이었다. 1960년대 당시에도 유명했고 지금도 여전한 명품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파수 곶감, 월촌 수박이 있었다.
함안은 따뜻한 지역이었으므로 탱자나무도 많았다. 1922년에 개교한 함안가야학교 울타리는 거의 모두 탱자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겨울철 교실 난로 땔감으로 탱자나무의 마른 가지 부스러기도 모아 사용했다. 학교 교정에는 은행나무, 오동나무가 있었고, 낡았지만 일제강점기 시절 교실 건물이 그대로 있었다. 함안은 습지의 고장이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개발로 많은 습지들이 사라졌지만, 일부 보호구역으로 보존되고 있다. 강변 습지에 조성된 함안의 경비행장도 볼만하다.
이민부 한국교원대 지리교육과 명예교수
rsunjun@fnnews.com 유선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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