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개혁 표류와 저소득층 배려 문제[포럼]

2024. 6. 3.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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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개혁이 정치권에 의해 몸살을 앓고 있다.

직전 제21대 국회에서 처리되진 못했지만, 그 내용이 국민연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정치적 주도권에 관심이 집중돼 있어 안타깝다.

그런데 이렇게 제도를 개혁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그래 보이진 않는다.

이러한 개혁 방향은 이미 선진국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찾아내 추진하는 다층보장 체제의 전형적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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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수 前 연세대 교수·사회보험

국민연금 개혁이 정치권에 의해 몸살을 앓고 있다. 직전 제21대 국회에서 처리되진 못했지만, 그 내용이 국민연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정치적 주도권에 관심이 집중돼 있어 안타깝다.

지금까지 제시된 연금개혁 방안은 간단하다. ‘보험료를 올리고 연금도 더 주자’는 것이다. 실제 제시된 개혁안은 재정 안정 방법으로 여야 모두 보험료율을 현재 9%에서 13%로의 인상을 제안했다. 연금 인상도 40년 가입한 경우 평균 소득 가입자 연금을 40%에서 여야는 각각 43%, 45%로 올리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제도를 개혁하면 문제가 해결될까? 그래 보이진 않는다. 개혁방안이 너무 단순하다. 기본적으로 보험료율이나 연금 인상 대상이 모든 가입자이고, 모든 연금 수급자다. 이는 적어도 현재의 보험료 부과 체계와 연금 지급 구조가 형평성 있게 작동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먼저, 보험료 인상은 가입자 소득에 따라 보험료 부담의 불공평성을 심화시킨다. 사실 국민연금의 부담 체계는 불공평하다. 국민연금의 현행 보험료율은 9%지만, 실제 보험료 부담은 일정 소득 이하에서만 부과된다. 국민연금에서는 월 590만 원 이상 소득자는 똑같이 590만 원을 기준으로 보험료를 부과한다. 예를 들어 590만 원 소득자와 그 두 배인 1180만 원 소득자의 연금 보험료는 똑같이 약 53만1000원이다. 그러니까 소득이 590만 원 이하일 때 국민연금 보험료는 9%지만, 1180만 원 소득자의 보험료는 4.5%로 절반의 보험료율이 적용된다. 보험료를 인상해서 13%가 되면 차이는 더 심해진다. 590만 원 이하 소득자의 보험료는 13%가 되지만 1180만 원 소득자는 6.5%가 돼 격차는 더 벌어지게 된다. 보험료율을 올리면 중간 이하 소득자와 고소득자 간 보험료율 차이는 오히려 늘어나는 결과가 돼 불공평성은 더욱 커지게 된다.

한편, 연금 인상안은 전체 가입자의 평균 소득인 사람이 40년 가입했을 때 받는 연금액을 계산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렵게 가입한 저소득자와 가입 기간이 짧은 사람은 연금을 인상해도 국가가 빈곤 계층에 지급하는 공적부조보다 오히려 낮은 연금을 받게 된다. 결국, 이번 개혁안들은 부담의 불공평성을 악화시키면서 재정 안정이나 노후 보장 효과는 기대할 수 없는 방안들이다.

바람직한 연금개혁 방향은, 보험료율 인상이 아니라 부과 대상 소득 상한선을 올리는 것이다. 그러면 보험료율을 13% 이상 인상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물론 고소득자의 연금액은 상한선을 둬야 한다. 또한, 연금 인상은 모든 연금 수급자가 아닌 저소득 계층과 가입 기간이 짧은 계층이 돼야 한다. 이를 위해 최저연금제도를 도입해야 한다. 그래야 국민연금을 받으면서 가난해서 공적부조를 받는 모순이 없어지게 된다. 이러한 개혁 방향은 이미 선진국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찾아내 추진하는 다층보장 체제의 전형적 형태다.

국민연금을 도입하는 중요한 기본 철학은 자유시장경제에서 나타나는 극단적 빈부(貧富) 격차를 완화함에 있고, 양보하는 부유층이 빈곤층의 적(敵)이 아니라 사회에서 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상생을 모색하는 방법이라는 점을 다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김진수 前 연세대 교수·사회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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