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를 죽이고도 처벌받지 않은 조선의 노주들...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2024. 6. 3. 11:32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34회>

지난 6월 1일 조선닷컴에 나의 글 “거짓, 과장, 허언, 선동: 어느 국뽕 한국사 유튜버의 마지막 강의”가 실렸다. 6월 1일 밤 당사자인 유튜버 A가 나의 글을 반박하는 동영상을 올렸다. 요지는 자신은 강의에서 조선 500여 년 역사에서 “노비를 죽이고도 처벌받지 않은 사례 10가지”를 찾아내면 강의를 그만두겠다고 했는데, 나는 “주인이 노비를 죽인 사례 13가지”를 찾아냈으므로 자신의 발언을 왜곡해서 공격했다는 비판이었다.

A의 강의에 격분한 서울의 바로 그 지인이 내게 직접 전한 말만 듣고서 꼼꼼히 그의 강의를 다시 청취하지 못한 점은 나의 잘못이다. 이 점에 대해선 A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한다. 하지만 때론 단순한 착각 때문에 오히려 더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논쟁이 진행될 수도 있지 않나?

이제 오해는 풀렸으니, 더 본질적인 논쟁으로 들어가 보자. A는 조선 500여 년을 통틀어서 주인이 노비를 죽이고도 처벌당하지 않은 사례가 10건 나오면 강의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여기서 “10건”이란 살해된 인명의 수로 따져야 상식에 부합한다. 10명이 죽으면 10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조선왕조 500여 년에 노비를 죽이고도 처벌당하지 않은 사례에 관한 역사 기록이 있는가? 있다면 과연 노비 몇 명이나 죽임을 당했는가?

이제 조선의 방대한 사료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조선시대 기록의 대부분이 왕실과 양반 계층에 의해 이뤄졌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양반 노주(奴主)가 노비를 죽이는 경우, 관아에 고발되거나 발각되지 않았는데도 노주 스스로 자기가 노비를 죽였다고 기록하는 경우는 매우 희귀하다. 그럼에도 사료 더미를 파고들다 보면 억울하게 죽은 노비들의 이름자와 함께 잔혹하게 노비들을 죽이고도 별일 없이 여생을 살다 간 그들의 양반 주인들의 행적이 드러나는 순간이 있다. 아래 제시된 사례들은 우연히 일회적으로 드물게 일어난 사건들이 아니라 일천즉천(一賤則賤)의 잔혹한 노비제를 수백 년 이어간 조선이란 나라의 사회적 모순이 중첩되어 터져 나온 대표적 사건들이라 할 수 있다. 때론 사료에 적힌 한 문장 속에 거시적 역사의 진실이 담기기도 한다.

<사례 1> “노비를 함부로 죽이는 잔인하고 포학한 무리들”

다른 글을 찾아보기 전에 우선 내가 6월 1일 올린 글에서 제시한 13가지 사례만 잘 읽어봐도 주인이 노비를 죽였는데 처벌받지 않은 사례가 다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세종실록>> 64권 1434년 6월 27일 기사에 실린 형조(刑曹)의 계문(啓文, 아뢰는 문장)엔 다음 문장이 나온다.

“잔인하고 포학한 무리들이 한결같이 노비가 고소(告訴)할 수 없으니 함부로 때려죽이옵는데······” “殘暴之徒, 一於奴婢不得告訴, 擅自歐殺.”

노비를 함부로 죽이는 행위를 천살(擅殺), 때려죽이는 행위를 구살(毆殺)이라 한다. 형조의 계문에 실린 이 한 문장엔 고소할 수 없는 노비들을 천살하고 구살하는 경우가 매우 빈번하다는 암시가 깔려 있다. 여기서 “한결같이” 때려죽인다는 표현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그러한 악행이 이미 관례화돼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형조가 적시한 “잔폭지도(殘暴之徒)”란 과연 몇 명을 두고 한 말일까? 상식적으로 특정 부류의 사람들을 무리 “도(徒)”자를 써서 분류할 때는 상당한 인수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많게는 100~1000명이 넘을 수도 있고, 작게는 10명 정도일 수도 있다. 백번 양보해서 극단적인 최소 숫자를 쳐도 5인 이상, 곧 다섯 사례 이상이라 짐작할 수 있다. 일상어에서 아무도 단 두 명 정도를 무리라 부르지 않고, 또한 그 둘이 한결같이 고소도 하지 않고 때려죽인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최대한 보수적으로 추산해도 벌써 주인이 관에 고하지 않고서 함부로 노비를 죽인 경우가 최소 5건 이상이라는 얘기다.

형조는 구체적 사건을 특정하여 보고하지 않고, 이미 이러한 일들이 온 나라에서 빈발하고 있다고 개탄한다. 그러나 앞뒤 어디를 읽어봐도 형조가 바로 그 “잔학지도”를 잡아서 형벌로 다스렸다는 기록은 한 줄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노비들을 죽이고 슬쩍 그 사건을 넘긴 운 좋고 포악한 노주들이었다.

물론 형조의 목적은 과거에 일어난 구체적 사건들을 들춰내서 사후적으로 처벌하려는 게 아니라 앞으로 유사한 사건 발생을 예방하려는 것이었다. “잔학지도”의 천살 행위를 막기 위해 형조가 마련한 방안을 보면 그 점을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금후로는 비록 죄가 있는 노비라 할지라도 만일 법에 따라 형벌을 주도록 하지 아니하고 제 마음대로 그릇 형벌을 하는 자[任情枉刑者]는 삼절린(三切隣, 가까운 이웃 세 집)과 오가장(五家長, 다섯 가장)이 즉시 모여 이것을 금지하고, 만일 법을 어기고 마구 형벌하여 죽임에 이르거든 삼절린과 오가장이 관령(管領)에게 달려가 고발하되, 외방(外方)은 감고(監考)·이정(理正)·이장(里長)이 고하여 검사 증험하고 전보(傳報)하면 법사에서 추핵하여 과죄할 것이옵고, 삼절린(三切隣)·관령(管領)·이정·이장 등이 주의하여 고찰하지 아니하거나, 때려 죽인 뒤에 실정을 알고도 숨겨 준 정상이 나타나면, 본인 자신과 삼절린(三切隣)·색장(色掌)을 추고(推考)하여 중한 죄로 논하게 하옵소서. 그 노비들이 넌지시 삼절린과 색장을 부추겨서 고발한 자는 한결같이 노비가 가장을 고발한 죄[奴婢告家長罪]의 예에 의하여 시행하옵소서.”

노주가 죄를 지은 노비를 직접 폭력으로 징치(懲治)할 경우, 고작 이웃 사람들이 관아에 고소해야 한다는 정도의 법령을 반포하라는 제안이다. 노비를 때려죽인 후 이웃 사람들과 작당하면 법적 처벌을 받지 않고 얼마든지 넘어갈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이 문단에는 노비들이 이웃 사람들을 부추겨서 노주를 고발하면 처벌한다는 규정이 적시돼 있다. 『경국대전』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노비는 주인의 잘못을 관에 고하지 못하게 규정한다. 이를 어기고 주인을 고소한 경우 해당 노비는 교수형을 당했다. 노비는 직접 주인을 고소할 수도 없고, 주변에 주인의 잘못을 함부로 얘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삼절린과 오가장 등 이웃의 감시만으로 과연 노비 천살을 막을 수 있었을까?

<사례 2> 노비의 신체에 대한 폭력의 일상화

16세기 대표적인 일기 사료 『묵재일기(默齋日記)』의 저자 이문건(李文楗, 1494~1567)은 집안의 노비들에게 틈만 나면 회초리질을 가했다. 편지 배달을 지체한 사내종(奴)은 회초리 30대를 맞았고, 지시 사항을 늦게 실시한 사내종도 매를 맞았으며, 더운물을 늦게 대령한 계집종도 가차 없이 구타당했다. 가축에게 채찍을 가하듯 이문건은 매를 들고 노비를 다스렸다.

<<쇄미록(瑣尾錄)>>의 저자 오희문(吳希文, 1539~1613)도 예외가 아니었다. <<쇄미록>> 전편을 통독하다 보면 가여운 노비들에게 잔정을 베푸는 따뜻한 주인의 모습도 있고, 잘못한 노비를 혹독하게 벌하는 냉혹한 노주의 모습도 보인다. 지난 글에서 이미 소개한 바와 같이 오희문은 계집종 강비와 눈이 맞아서 말을 훔쳐 달아난 사내종 한복을 큰 몽둥이로 70~80대나 쳐서 결국 죽게 했다. 오희문은 한복을 죽일 생각은 없었다. 노주가 사적으로 달아난 노비를 잡아 징벌하는 과정에서 불의의 사고가 났다고 할 수 있다.

세종 연간에 형조의 제안처럼 삼절린이나 오가장 등 이웃들이 나서서 그 사실을 관아에 고발했는가? 전혀 아니다. <<쇄미록>>을 읽어 보면 오히려 양반가들이 서로 협력하여 달아난 노비를 잡아 왔다. 또 관아에서도 그 사건의 내막을 다 인지하고 있었지만, 오희문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조선의 노주들은 오랜 관습법에 따라서 가축을 부리듯 노비를 부렸고, 가축을 채찍질하듯 노비들을 매질했다. 어느 사회든 그렇게 폭력이 일상화된 상황에선 언제 어디서든 “턱” 치니까 “억!”하고 죽었다는 식의 무지몽매한 폭력에 의한 불의의 살인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런 사건이 일어나면 대다수는 집안에서 쉬쉬하며 넘어가기 일쑤였다. 따라서 노주가 자력으로 노비를 살해한 기록이 많이 남을 수는 없지만, 사료의 행간을 잘 뜯어보면 억울하게 죽은 노비들의 절규를 들을 수 있다.

<사례 3> 무뢰한 노비를 징치한 어느 양반의 논리

오희문은 눈 맞아서 말을 훔쳐 달아난 강비와 한복을 잡아 와서 분한 마음에 벌을 주었지만, 그 노비를 살해할 의도는 없었다. 반면 지난 글에서 소개한 서울의 유명한 문인 이서구(李書九)는 명백한 살인의 의도를 품고서 주노(主奴)의 강상(綱常)을 어긴 사내종을 집안 노비들을 시켜서 직접 쳐 죽이라고 명령했다. 바로 그 사내종이 전날 술에 취해서 주인을 향해 험구를 놀렸다는 이유였다. 이후 형조의 서리가 찾아와서 댁의 종이 시구문밖에 죽어 있는 영문을 묻고자 나왔을 때, 이서구는 “강상을 범한 노를 관에 고한 다음에 다스려야 마땅하지만, 그러면 집안의 수치가 밖으로 드러나게 되니 어쩔 수 없이 내가 사사롭게 죽였다”고 대답했다. 그것으로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영훈,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노비는 함부로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 백년동안, 2018, 참조).

이 사건은 조선 정부와 양반 노주들이 노비 관리에서 긴밀한 협력자 관계(partnership)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서구는 사내종 하나를 죽여놓고도 어떻게 그리도 당당할 수 있었을까? 비밀은 바로 조선에서 준용했던 <<대명률>>에 숨어 있다.

『대명률』은 주인을 폭행한 노비는 참수형에, 주인을 향해 폭언하거나 모욕적 언사를 내뱉으면 교수형에 처하라고 규정한다. 이서구는 바로 그 법을 잘 알고 있다. 그랬기에 국가를 대신해서 술에 취해서 자신에게 욕설을 내뱉은 사내종을 나랏법에 따라서 처리했고, 포도청에서 조사를 나왔을 땐, 발칙한 사내종을 하나 엄형으로 다스렸다고 말할 수 있었다.

본래 조선의 국법에 따르면 그런 사례가 발생하면 관아에 고소해서 공권력에 의한 교수형이 집행되어야 하지만, 이서구의 사적인 노비 처형을 형조는 사후적으로 용인했다. 사적으로든, 공적으로든 잘못한 노비를 처형했다면 정의가 실현됐다고 생각했던 듯하다. 그렇지 않고선 이 중대한 천살의 사건이 그렇게 종결될 수는 없다.

<사례 4> 양반과 국가의 협업에 의한 노비 살해

양반과 국가가 공조하여 노비를 학살한 사례는 심심찮게 보인다. 일례로 중종실록 34권 1518년 9월 10일에 기재된 다음 기사를 보자.

“의성(義城)에 사는 사노(私奴) 김이동(金伊同)·검동(檢同)·물금(勿金) 등이 그의 주인 김연손(金連孫)을 꾸짖고 욕한 죄는 〈조율하였는데〉 모두 삼복(三覆)이었다. 상이 이르기를, ‘다 율대로 하라.’ 하였다.”

여기서 삼복(三覆)이란 사형죄를 저지른 죄인(罪人)에 대한 초복(初覆), 재복(再覆), 삼복(三覆) 등 3차례에 걸쳐 심리(審理) 과정을 의미한다. 김이동, 검도, 물금이란 이름의 사내종들이 국가폭력에 의해 교수형으로 살해되는 장면이다. 표면상 적법한 과정을 통해서 정의가 실현된 듯하지만, 주인을 꾸짖고 욕을 했다는 터무니없이 작은 죄만으로도 국가가 세 명의 노비를 처형했음은 충격적이다.

여기서 살인의 주체는 바로 모욕당한 그 주인이다. 그 주인은 자신을 모독한 사내종 3인을 죽이기 위해서 나랏법을 수단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을 꾸짖고 욕했다는 이유만으로 세 명의 사람이 처형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는 노주가 노비들을 죽이기 위해서 국가권력을 이용해서 “합법적” 린치를 가했다. 말하자면 양반과 국가의 공조에 의한 사법 살인이었다.

이서구의 경우처럼 직접 잘못한 노비를 죽여도 포도청에서 사후적으로 용인하고 넘어가기도 했지만, 만약 이서구가 그 노비를 관아에 고발하면 국가가 나서서 대신 처형했을 것이다. 주인에게 욕을 한 노비를 국가가 나서서 교수형에 처하는 나라, 그게 바로 조선이었다.

<사례 5> 사이코패스 연산군의 노비 대학살

조선 왕실은 대규모 노비 군단(群團)을 소유하고 있었다. 임금이 노비를 죽였다면 그 역시 노주에 의한 노비 살해의 일례라 할 수 있다. <<연산군일기>> 60권 1505년 10월 3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잔혹한 장면이 등장한다.

“흥청방(興淸房)의 비(婢) 종가(從加)를 죽여, 그 시체를 자르고 쪼개라고 명하였다. 또 승지 권균(權鈞)·강혼(姜渾)·한순(韓恂)과 이조 판서 김수동(金壽童), 예조 판서 김감(金勘)에게 명하여 감형(監刑, 형 집행을 감독함)케 하고, 무릇 죄인 노비로서 공천(公賤)에 속해 있는 자는 모두 차례로 서서 보게 한 다음 곧 효수(梟首)하여 사방으로 시체를 보내게 하였다.” (命殺興淸房婢從加, 刳剔其屍。 又命承旨權鈞、姜渾、韓恂、吏曹判書金壽童、禮曹判書金勘監刑, 凡罪人奴婢屬公者, 皆令序立觀之, 卽令梟首, 傳屍四方。)

시체를 자르고 쪼개는 형벌인 잔인한 고척지형(刳剔之刑)이 바로 이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기록을 보면 흥청방의 계집종 종가 외에도 죄를 지은 공노비들을 함께 죽이고 그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내걸고서 사방으로 그들의 시체을 보냈다고 해석될 수 있다. 만약 그랬다면 연산군이 잔인하게 살해한 노비의 수는 실로 부지기수다.

문맥상 죄를 지은 공노비들을 종가가 처형되는 현장에서 서서 보게 하여 고통을 줬다고 해석될 수는 있지만, 그렇게 해석한다면 사방으로 시체를 보냈다는 구절과 잘 호응하지 않는다. 여기선 성난 연산군이 종가와 함께 죄를 지은 공노비들을 도살했다고 사료된다. 단 한 명의 시신을 사방으로 보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미치광이 군주 연산군의 지극히 예외적인 일탈이랄 수 있지만 그의 폭력이 노비라는 사회적으로 아무런 권리가 없는 비천한 존재들에 향해 있다는 점에서 조선왕조의 구조적 폭력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때 도살된 노비의 수는 족히 10명은 넘었을 듯하지만, 기록이 상세하지 않아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다.

<사례 6> 영조(英祖)의 아량: 홧김에 울컥하여 처가 계집종을 때려죽였으니 고의라 할 수 없다?

승정원일기 994책 (탈초본 54책) 1745년 11월 26일 계사 14/14 기사를 보면, 시장판에서 술을 팔던 권필재(權必才)란 양인 사내가 전병(煎餠)을 파는 한 여자와 자리다툼을 하다가 때려죽였다. 조정 대신들의 조사에 따르면 권필재에게 맞아 죽은 그 여자의 상전이 공교롭게도 권필재의 장인이었다. 조정 대신들은 그 사실을 들어서 권필재가 고의로 그 처가의 계집종을 때려죽인 게 아니라 홧김에 울컥해서 때리다가 죽었으니 마땅히 권필재를 살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영조는 “사람의 처부모는 성이 다른 사촌과는 다르다. 처가의 노비는 바로 처의 노비다”라면서 “필재가 당초 때린 것은 살의에서 나온 게 아니라 시장서 자리다툼을 하다가 일시에 구타했는데 죽음에 이른 것이니 이는 마땅이 용서해야 한다”고 판결한다. 영조는 덧붙인다. “그 처의 입장에서 보면 그 계집종이 죽어서 자기 남편이 목숨을 잃어야 한다면 얼마나 원통하겠는가? 이는 왕정에서 차마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上曰, 人之妻父母, 異於異姓四寸, 妻家奴婢, 卽妻之奴婢也。以其妻言之, 則以其婢之死, 其夫將償命, 則其冤怨, 當如何? 此非王政之所可忍。且有意而敺打, 則爲故殺, 而必才, 當初所打, 非出於欲殺之意, 不過爭其買賣所坐之處, 一時敺打, 邂逅致斃, 此則宜有容貸之道矣.)

영조는 그렇게 판단하는 근거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같은 자리에 앉아서 함께 술과 전병을 팔고 있었으니 [권필재는] 상시(常時)로 모욕을 당해서 주인과 노비의 분수가 엄격하게 나뉘지 못했을 듯하고, 그 계집은 필시 나이는 많고 성격은 악독했을 것이다.”(上曰, 同坐賣酒餠, 則常時見侮, 奴主之分, 似未能嚴截, 而此女必年老而性惡者矣.)

조정 대신들도 이구동성으로 “처가처럼 가까운 인척의 노비는 곧 그의 노비와도 같으니 용서의 도가 있어야 한다(且緇[緦]麻親中妻家奴婢, 便是渠之奴婢, 則亦有可恕之道.)”고 거들었다. 결국 영조는 홧김에 울컥해서 자기 소유라 해도 진배없을 처가의 계집종을 때려서 본의 아니게 죽였으니 고의라 할 수 없다며 그의 목숨을 살려 줬다. 영조의 판결에 죽은 자의 신분이 계집종인데, 알고 보니 처가의 계집종이라는 사실이 필재를 살려 준 결정적 이유였음은 분명하다.

<사례 7> 정조(正祖)의 역발상, “종년의 남편을 죽였다고 주인을 벌하랴?”

요즘까지도 조선 최고의 성군(聖君)이라 칭송되는 정조(正祖, 1752-1800)는 1793년 양반가 계집종의 남편을 징치(懲治)하다가 죽이는 경우, 상전의 형사책임을 감면하는 교시를 내렸다.

서울 중부의 박소완(朴紹完)이 계집종의 남편 방춘대(方春大)를 폭행하여 죽게 한 사건을 놓고 심의한 후 정조가 내린 판결이다. 계집종의 양인 남편을 보통 비부(婢夫)라 하는데, 말 그대로 계집종의 남편이란 의미다. 신분은 양인이지만 노비처럼 양반가에서 얹혀살며 갖은 일을 도맡아 하던 경제적 예속 상태의 존재로 사실상 노(奴, 사내종)와 같은 존재였다. 비근한 예로 비부가 처(妻)의 상전을 고발하면 곤장 100대와 3천리 밖으로 유형을 받는다는 규정이 <<경국대전>>에 나와 있다. 비부의 법적 지위는 양인보다 한 단계 낮았다. (이상 정긍식, 1793년(정조 17) <婢夫定律>, <<서울대학교 법학>>제53권 (2012): 267-298 참조).

박소완은 비부 방춘대를 징치(懲治)하는 과정에서 살해했다. 여기서 징치란 징계하고 다스린다는 의미지만, 실상은 야단치고 매질하는 행위를 이른다. 기록에 따르면 방춘대는 술에 취해 박소완에게 욕설을 퍼부었고, 성난 박소완은 방춘대의 머리채를 잡고 내치는 과정에서 방춘대를 살해했다.

이 사건을 놓고 조선 조정은 비부에 대한 처의 상전이 갖는 징계권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라는 법리적 문제를 놓고 논란을 벌였는데, 결국 정조는 비부로서 처의 상전을 능멸한 방춘대의 잘못에 격분하여 박소완에 대한 형사처벌을 면제했다. 아울러 정조는 계급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발칙한 행위를 한 비부에 대해선 처의 상전이 그를 때리거나 벌을 주다가 설혹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해도 처 상전의 형사책임을 감면하는 법을 제정했다. 형식상 양인이지만 현실적으로 사내종과 다를 바 없는 비부에 대해서도 주인집에 ‘생사여탈권’을 인정한 셈이다. 그런 악법은 이후 대대로 조선에서 시행되었다. 쉽게 말해서 비부를 때려죽여도 처 상전은 형사적으로 처벌되지 않았다.

<사례 8> 솜방망이 처벌, 실질적 무죄 방면

<<대명률(大明律)>>에 따르면 노비를 “관에 고하지 않고 함부로 죽이는(不告官擅殺)” 경우 노비에게 죄가 있으면 장형 100대, 죄가 없으면 장형 60대에 도형 1년에 처한다는 규정이 있지만, 조선 군주들은 노비를 죽인 양반 주인들을 법에 따라 엄하게 다스리지 않았다. 조선 국왕은 일반적으로 벼슬이 높을수록, 권세가 클수록 더 큰 특혜를 베풀었다. 아무리 죄질이 나빠도 <<대명률>>의 법조항 따위는 고관대작에게 적용되지 않았다.

일례로 세종실록 89권 세종 22년(1440년) 6월 10일 기사엔 삼정승 중 두 번째로 이재(二宰)라 불리는 좌찬성(左贊成, 종1품) 이맹균(李孟畇)의 처 이씨가 이맹균이 총애하던 계집종을 함부로 죽였다. 집안의 계집종이 죄가 있어 이맹균의 아내가 종들을 시켜서 때리고 머리털을 잘랐는데, 그만 갑자기 죽고 말았다. 그는 집안 종들을 시켜서 그 시신을 몰래 매장하라 시켰는데, 아마도 부당하다고 느낀 종들이 그 시체를 홍제원 길가에 버려뒀고, 결국 온 세상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맹균은 세종 앞에서 자신은 전날까지 알지 못했다고 거짓을 아뢰었다.

이미 전후 사정을 소상히 들어서 알고 있던 세종은 맹균이 그 계집종을 가까이 끼고 살자 질투한 아내 이씨가 사적 린치를 가해서 죽였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말했다. 이에 조정 대신들이 나서서 처벌해야 한다고 했는데, 6월 16일 기사를 보면 맹균의 관직을 파면하고 이씨는 작첩(爵牒, 작위를 고하는 사령장)을 빼앗는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멀쩡한 사람을 잔혹하게 죽인 범죄자와 왕 앞에서 거짓으로 발명하던 공직자를 고작 이런 식으로 처벌하는 것은 실제로는 무죄 방면과 다름없다. 치정에 얽혀 살인한 자를 고작 작첩 박탈로 다스렸다면, 상식적으로 형법에 의거한 처벌이라 할 수 있는가? 비유하자면 잔인하게 정부를 살인한 한 의사가 있는데, 고작 자격증 박탈에 그친다면 그걸 과연 누가 처벌이라 생각할까?

<사례 9> 사노(私奴) 엄삼(嚴三)의 억울한 죽음

<<세종실록>> 81권, 세종 20년 (1438년) 6월 16일에 실린 기사다. 김종례(金從禮)란 자가 도둑맞은 물건을 찾는다며 사노 엄삼을 때려죽이고는 자신도 병사했다. 이에 국법에 따라서 그의 아들 무상(武祥)과 사내종 황룡이 종범이므로 장형 1백을 시행하고 삼천리 유형에 처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지만, 결국 세종은 이 두 명의 종범은 치죄하지 않기로 하고 이 사건 자체를 접어버렸다.

어질기로 소문난 영의정 황희(黃喜, 1363-1452) 등이 사실상 김종례의 무죄를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김종례가 처음에 죄를 스스로 인정했으나 나중에 취초(取招) 과정이 잘못됐다며 불복하고 항소했다는 이유였다. 아울러 황희 등은 그의 아들과 사내종은 치죄하지 말자고 건의했고, 세종은 이에 따랐다. 설사 노비가 주인의 물건을 훔쳤다고 해도 주인이 관아에 고하지도 않고서 사적으로 때려죽였는데,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다.

<사례 10> 잔혹하게 살해된 비첩(婢妾) 덕금(德金)의 한(恨)

<<세종실록(世宗實錄)>> 37권 세종9년 (1427년) 8월 24일 기사엔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 권채(權採)가 여종 덕금(德金)을 첩으로 삼았는데, 권채의 부인 정씨가 질투하여 덕금을 이루 말할 수 없이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해서 죽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국문(鞫問)을 거듭한 결과 의금부는 다음과 같은 계문(啟文)을 발표했다.

“권채(權採)가 비첩(婢妾) 덕금(德金)을 고랑으로 채워서 집안에 가두었는데, 그 아내 정씨(鄭氏)가 덕금을 질투하여, 머리털을 자르고 똥을 먹이고 항문(肛門)을 침으로 찌르며 하루 걸러서 밥을 주는 등, 여러 달을 가두어 두고 학대하여 굶주리고 곤고(困苦)하여 거의 죽게 되었으니, 형률에 의거하면 권채는 장 80, 정씨(鄭氏)는 장 90에 해당합니다.”

그러한 의금부의 계문에도 세종은 권채에 대해선 직첩 회수와 외방 부처(付處)의 조치만을 취했다. 정씨는 속장에 처하게 하였다. 비첩 덕금을 고랑으로 채워서 집안에 가둔 자는 권채였고, 덕금을 고문하여 죽인 자는 정씨였다. 의금부의 조사 결과 두 사람은 공범으로 드러났다. 그런데도 세종은 집현전 응교였던 권채에 대해선 국법에 따라 제대로 된 처벌조차 내리지 않았다.

결론: 노비를 죽이고도 처벌받지 않은 노주들

이상 열 가지 사례에서 우리는 10건을 훌쩍 넘는 많은 인명 사고가 발생했음을 확인했다. 이 기록들 속에서 숨진 노비는 문자 그대로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상식적인 독자라면 “잔인하고 포학한 무리들이 한결같이 노비를 고소(告訴)하지 아니하고 함부로 때려죽이옵는데”라는 <사례 1>의 첫 문장만 보고서도 세종 연간 조선 사회에 노비를 함부로 죽이고도 처벌받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 글에서 나는 가장 보수적으로 신중하게 사건 수를 한정했다. 연산군이 살해한 공노비의 수도 상세히 할 수는 없지만, 시체를 사방으로 보냈다는 것을 보면 상당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그가 죽인 노비들 한 명, 한 명이 하나의 법적 사례를 구성한다. 따라서 아무리 낮게 쳐도 이 글에서 나타난 살해된 노비의 수는 10명을 넉넉히 훌쩍 넘는다. 많게는 수백 명, 수천 명까지 볼 여지도 있다.

이영훈 교수의 실증적 연구에 따르면 세종조부터 노비 천살을 막으려는 조정 대신의 노력이 있었지만, 성종조 이후부턴 노주들이 노비들을 벌주다 죽이고도 처벌받지 않는 사례가 계속 늘어났다. (이상 이영훈, <<세종은 과연 성군인가: 이영훈 교수의 환상의 나라>> 참조).

지난 글에서도 말했지만, 노비는 왕실과 양반가의 소중한 재산이므로 양반 주인들은 재산 관리를 철저히 했다. 다른 가축과는 달리 노비는 충분한 지력과 삶의 의지와 복잡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다. 조선시대 노비가 격정에 휩싸이거나 모략을 꾸며서 주인을 죽인 사례 역시 부지기수다. 그러나 조선은 노비의 법적 권리를 완전히 박탈한 “노예 국가(slave society)”였다. 세계 노예제 연구의 대가 올란도 패터슨(Orlando Patterson, 1940- )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조선 노비들은 이미 “사회적 죽음(social death)”을 맞은 좀비와 같은 존재들이었다.

100만 이상의 구독자를 가진 한국사 유튜버 A는 말했다.

“조선왕조 500년 갔다라고 했죠. 제가 역사를 공부해본 바로, 500년 동안에 양반 주인들에게 노비가 얻어터져 가지고 (죽었을 경우) 그 노비의 주인이었던 양반들이 어떤 죄[형벌]도 받지 않았던 경우가 500년 동안에 열 건 넘은 거 있으면 제가 마이크 놓고 강의를 그만두겠습니다.”

위에서 제시한 10개 사례는 조선조 500여 년에 걸쳐 노비를 천살하고도 적절한 법의 처벌을 받지 않은 노주들이 수없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증거들이다. 지성인이라면 그런 사례가 10건뿐 아니라 100건, 아니 1000건도 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누구든 “우리 역사를 진정 사랑한다면” 잔혹한 노비제를 수백 년 이어간 조선의 국왕이나 양반 지배계층이 아니라 양반가 분재기(分財記)에 말똥, 개똥, 소똥, 빗자루 등등의 비천한 이름자만을 올리고 가뭇없이 사라져간 노비들을 사랑해야 하지 않겠나? 전답, 가옥, 가축 그리고 노비를 독점한 지배계급이 아니라 천시와 학대 속에서도 민들레처럼 그 땅에서 꽃피며 살아갔던 어여쁜 조선의 민초들을······.

앞으로도 조선 노비 관련된 중요한 사료가 발굴되면 “슬픈 중국” 시리즈를 통해서 알릴 예정이다. 천살(擅殺)당한 노비들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속에 그들의 위령비를 세우고 묵념을 올린다. 한국인은 모두가 결국 조선 노비들의 자손들이기 때문이다. <계속>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