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간병인과 함께 비 맞는 사람···돌봄 필요한 간병인 있는 곳 어디든 달려갑니다"
장애인 봉사에 뿌듯했던 소녀, 간병인 '멘탈 관리 전도사'로
"뇌종양 시어머니 간병 후유증에 PTC 필요성 절감
간병인 멘탈 관리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갑니다"
경남 김해에 사는 10대 소녀 성희의 꿈은 사람들을 도우며 사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 꿈을 실현할지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자신의 손길로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얻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막연한 생각뿐이었다. 막연했던 꿈은 농아학교 봉사활동을 계기로 선명해졌다. 생각을 말로 잘 전달할 수는 없지만 함께 시간을 보내며 환하게 웃는 아이들을 보니 무언가 도움이 된 것 같아 가슴이 뛰었던 것. 약 40년이 지난 지금, 자신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 하나에 가슴이 뛰었던 10대 소녀는 이제 아픈 사람들을 돕는 간병인을 돕는 사람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바로 이성희(65) 케어기버 마음살림 사회적협동조합 대표 얘기다. 라이프점프는 이 대표를 만나 농아학교에서 조합 활동까지 약 50년에 걸친 그의 봉사 이야기를 들어봤다.
농아학교 봉사활동을 계기로 이 대표의 꿈은 선명해졌다. 대학 진학을 앞두고 교육학과로 진로를 정했다. 졸업 후 한 농아학교의 교사가 됐다. 당시 월급은 14만 원. 많지 않은 돈이었는데, 그나마도 학생들을 위해 썼다. 주말이면 학생들을 순번대로 목욕탕에 데리고 가 씻기고, 간식도 사 먹였다. 학교 밖에서는 수어 통역 봉사도 자진했다. 이런 그의 모습을 남편도 응원해줬다.
1987년, 학업을 위해 한국을 떠나는 남편을 따라 이 대표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로부터 3년 뒤, 한국에 있는 시누이로부터 시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악성 뇌종양이었다. 간병인을 구해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기 일쑤라는 얘기에 이 대표는 학업 중인 남편을 남겨둔 채 아이 둘을 데리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도움이 필요하다기에 앞뒤 재지 않고 돌아왔지요. 그렇게 87일 간의 간병이 시작됐어요.”
거동이 어려운 데다 치매까지 온 시어머니를 돌보는 일 외에도 두 살짜리 첫째와 3개월 된 둘째도 챙겨야 했다. 여기에 생업에 뛰어든 시누이를 대신해 다섯 살과 세 살짜리 두 조카도 이 대표가 돌봐야만 했다. 하루하루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3개월이 채 지나기 전 시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여름 내내 이어진 그의 독박 간병은 끝이 났다. 후유증은 컸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종종 구역질이 나왔다. 장마철 내내 독박 간병한 기억이 떠올라 최근까지도 장마철이 되면 숨이 막히고 가슴이 답답할 정도였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제대로 못 잤지요. 다른 이들을 돌보느라 정작 저 자신을 돌보진 못했던 거죠. 급성 간경화가 왔고 몇 년 뒤에는 갑상선 암도 발견됐죠. 지금은 다행히 완치가 됐지만요.”
PTC를 만나고 다시 가슴이 뛰었다
시어머니 장례를 치른 뒤 이 대표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아시안보건복지센터(AHSC)에 취직하는 등 평범한 삶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랬던 이 대표는 2006년 다시 가슴이 두근거리는 순간을 맞이했다. 농아학교로 봉사활동을 나갔던 고교생 때처럼 짜릿한 두근거림이었다.
그의 가슴을 뛰게 한 것은 ‘PTC(Powerful Tools for Caregivers)’라는 프로그램이었다. 간병인들이 겪는 우울감이나 스트레스를 관리해 이들이 스스로를 잘 보살피도록 돕는 것인데 쉽게 말해 간병인의 ‘멘탈 관리’인 셈. 시어머니를 간병하며 이를 뼈저리게 느낀 이 대표였기에 PTC의 존재가 매우 크게 다가왔던 것. PTC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PTC 트레이너 자격을 취득했다.
2012년, 한국으로 돌아온 이 대표는 ‘PTC 전도사’를 자임하며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힘썼다. 당시만 해도 간병은 가족의 몫이라는 시선이 주를 이뤘다. PTC도 자격증 등 비즈니스로 접근하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3~4년이 흐르고 간병 자살이 사회적 문제로 떠오르자 PTC의 필요성을 알아주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대표는 주위의 요양보호사, 간호사 등에게 함께 공부하자고 제안했다. 이어 간병 경험이 있는 이들과 힘을 모아 2018년 케어기버 마음살림 사회적협동조합을 세우기에 이르렀다.
서른 한 살이던 이 대표가 독박 간병을 해야만 했던 1987년과 비교하면 인식은 많이 달라졌다. 간병인도 돌봄이 필요하다는 생각 만큼은 다수가 동의하는 듯하다. 그럼에도 우리 주위에는 어려움을 호소하는 간병인이 적지 않다. 특히나 비용 부담 때문에 직접 아픈 가족을 돌봐야 하는 이들은 환자와 집에 발이 묶일 수밖에 없다. 이런 이들을 위해 이 대표는 간병인의 멘탈 관리가 필요한 곳이라면 전국 팔도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간다.
그 과정에서 이 대표는 많은 이들을 만났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40년 가까이 키우며 간병의 버거움을 느끼는 부부, 치매 걸린 남편의 폭언과 폭행을 감내하는 아내, 유방암에 걸린 딸과 그 딸을 대신해 손녀를 돌보는 70대 할머니 등.
“많은 이들이 간병 중 누적된 스트레스 때문에 솟아오르는 분노나 죄책감, 우울, 고립감 등으로 건강이상에 시달려요. 가족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힘들다고 말하면 ‘그냥 요양병원에 보내면 되지 왜 사서 고생이냐’고 사정도 모르는 채 말을 던질까봐 말 한 마디 못하고 속앓이만 하는 간병인도 여럿이에요.”
이런 이들을 위해 이 대표는 간병인의 곁을 오랫동안 지킬 생각이다. “‘너무 힘들다’고 한탄하던 이들이 마음을 터놓으면서 ‘나만 힘든 게 아니었네’라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큰 변화를 불러올 수 있어요. 저는 간병인과 함께 비를 맞는 사람이 될 거에요. 동병상련의 아픔을 공유하며 이들이 기운을 낼 수 있도록 함께하겠습니다.”
정예지 기자 yeji@rni.krCopyright © 서울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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