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신생 뷰티 브랜드들이 지난해 줄줄이 호실적을 거두며 K-뷰티 세대교체에 도전하고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제품이 쏟아지는 뷰티 시장에서 MZ세대의 지갑을 연 비결이 궁금하다.
그룹 BTS의 리더 RM은 지난해 3월 한 스페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K 수식어’가 지겹지 않냐는 질문에 "(오히려) 프리미엄 라벨"이라며 "우리 선조들이 쟁취하려 노력한 품질보증 같은 것"이라고 답한 바 있다. 그 말처럼 'K’는 믿을 만한 보증 수표다. 최소한 '뷰티’ 영역에서는.
근거 없는 '국뽕’이 아니다. 관세청에 따르면 올 1~3월 화장품류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21.7% 증가한 23억 달러로 동기간 역대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관세청은 "한류로 높아진 K-뷰티에 대한 관심에 우수한 품질의 국내 제품들이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며 수출품과 수입국이 다변화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덩달아 한국콜마와 코스맥스 등 국내 화장품 ODM 기업들도 올해 1분기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한국콜마의 1분기 매출액은 5748억 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7.9% 늘었다. 코스맥스는 30.6% 오른 5268억 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 역시 각각 168.95%, 229.1% 급증해 324억 원과 455억 원을 돌파했다. 이베이재팬이 발표한 큐텐재팬의 2월 뷰티 카테고리별 판매 랭킹을 살펴보면 K-뷰티의 저력이 보다 실감 난다. 립 메이크업 부문은 1위부터 5위까지 차례로 국내 뷰티 브랜드인 롬앤, 라카, 네이처리퍼블릭, 딘토, 어뮤즈가 석권했다. 아이섀도, 치크 카테고리 랭킹 톱 5에도 국내 브랜드들이 각각 4자리씩 차지했다.
주목할 점은 차트에 이름을 올린 대다수가 인디 뷰티 브랜드(신생·독립 뷰티 브랜드)라는 점이다. 중소벤처기업부의 2023년 수출 동향 발표 자료에 따르면 중소기업 수출 품목 1위는 화장품이다. 국내에서도 중소 뷰티 브랜드들의 약진이 심상치 않다. 뷰티 큐레이션 플랫폼 잼페이스는 지난해 국내 뷰티 브랜드 인기 상위 50개 제품 가운데 66%가 중소 브랜드 제품이라고 분석했다. CJ올리브영에 입점된 연 매출 100억 원 이상의 중소 뷰티 브랜드 수도 2019년 16개에서 2022년 34개로 2배 이상 늘었다. '푸딩팟’ '퓌쿠션’ 등 품절 대란템을 잇따라 탄생시킨 코스메틱 브랜드 '퓌’는 설립 3년여 만인 지난 2월 서울 성수동에 단독 플래그십스토어를 오픈했다. 중소 뷰티 브랜드는 자금력이 부족해 오프라인이 아닌 이커머스 시장에만 집중한다는 편견이 깨진 것.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 같은 '공룡’들이 장악했던 뷰티 시장에 조금씩 균열이 가고 있다.
인디 뷰티 브랜드들이 국내에 이어 해외 MZ세대 '코덕(코스메틱 덕후)’들의 지갑까지 열게 만든 비결은 간단하다. 제품력은 기본에다 정형화되지 않은 통통 튀는 패키지와 소비자들의 니즈를 파악한 다채로운 색조 라인업 덕분. 하지만 이는 기업 규모와 관계없이 뷰티 브랜드라면 당연히 방점을 찍는 지점이다. 인디 브랜드들의 인기에는, 멀어지던 시선도 한 번 더 잡아끄는 독창적인 기획과 마케팅이 숨어 있다.
소통 맛집 SNS 마케팅
요즘 10대들 사이에서 카카오톡은 '아재 메신저’라는 웃픈 소문이 돈다. 카카오톡은 학급 공지 방처럼 공적인 목적으로 쓰는 애플리케이션(앱)이고 개인적인 연락은 인스타그램 DM으로 보낸다. 10대뿐만 아니라 20대들도 처음 만나면 서로의 전화번호가 아닌 인스타그램 계정을 묻는다. 앱·리테일 분석 서비스 와이즈앱·리테일·굿즈(와이즈앱)에 따르면 올 4월 기준 인스타그램은 한국인 스마트폰 사용자가 가장 오래 사용한 앱 3위에 올랐다. 와이즈앱이 모바일 앱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한 2016년 3월 이래로 인스타그램이 네이버를 제치고 3위에 오른 것은 최초다. 인스타그램 외에 틱톡, X(옛 트위터)가 각각 5위, 7위를 차지했다. 뿐만 아니라 올해 1분기 국내 스마트폰 사용자의 앱 월평균 실행 횟수를 분석한 결과, 인스타그램은 약 149억3374만 회로 카카오톡(727억108만 회)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코스메틱 브랜드들이 SNS 마케팅에 열을 올리는 이유다.
하지만 초 단위로 새로운 피드가 뜨는 인스타그램 세상에서 제품 이미지 컷이나 영상을 올리는 것만으로 이용자들의 눈길을 끌 수는 없다. 간혹 무지개맨션의 '오브제 리퀴드 틴트’처럼 감도 높은 패키지로 자체 바이럴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드문 사례다. 인플루언서에게 제품을 제공하거나 광고를 맡기는 방식도 한계가 있다. '#광고’가 붙은 게시 글을 보자마자 스크롤을 내려버리는 경우가 부지기수인 데다 재미있는 것이 넘쳐나는 SNS에서 굳이 제품 소개를 볼 이유는 없어서다.
‘SNS 맛집’이라고 불리는 힌스는 제품을 내세우기보다는 이용자들이 놀 수 있는 판을 만들었다.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자사 제품을 사용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나도록 눈썹을 바꿔주는 인스타그램 사진 필터를 제작한 것이 대표적이다. 키치한 무드의 'GIPHY’ 스티커를 배포한 것도 한몫했다. 순수하게 '귀엽다’는 이유로 이용자들이 스티커를 자발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브랜드에 대한 친근감도 높아졌다.
SNS 담당자들이 전면에 나서서 브랜드가 아닌 '개인’으로서 소통하며 고객들과 친밀감을 형성하기도 한다. 이는 특히 인스타그램보다 가벼운 접근이 가능한 X에서 공식 계정을 운영할 때 사용하는 전략이다. 글로우의 공식 X 계정 소개 글은 "글로우 디자이너입니다. 이 계정은 제 겁니다(찡긋)"이다. 게시 글도 "나 디자이너인데 오늘부터 계정 운영… 응원해줘" "저 내일 연차 쓰고 여행 가요" 등 자유롭게 올린다. '사원 1’이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한 키르시블렌딩이나 헤메코랩, 투에이엔 역시 마찬가지다. 기업이 아닌 동년배 직장인의 일상을 공유해 팔로어들과 공감대를 쌓고, 자연스레 제품 기획 과정과 출시 소식을 알린다. 브랜드를 언급한 이용자들의 트윗을 리트윗하고, 칭찬에는 고맙다고 응수하는 등 고객들과 직접적인 소통을 이어가기도 한다. 소비자들과 라포를 형성하고, 소통을 통해 구체적인 니즈를 파악할 수 있어 최근 인스타그램만 운영하던 브랜드들도 X 계정을 개설하는 추세다.
여기서만 즐겨요 팝업스토어
팝업스토어는 이미 뷰티뿐만 아니라 패션, 엔터 등 감도 높은 산업계 전반에 퍼져 있는 성공 공식이다. 하지만 제품의 쇼룸 역할만 하는 팝업스토어는 일반적인 판매 매장과 다를 바 없다. 뷰티 이커머스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온라인에서 오프라인보다 저렴하게 구매할 수도 있다. 굳이 팝업스토어에 와야 할 이유를 만들어줘야 하는 것이다.
신생 인디 뷰티 브랜드들은 DIY에서 힌트를 얻었다. 지난 3월 서울 성수동에서 팝업스토어를 전개한 딘토의 '커스텀 립팟 체험’이 대표적이다. 15종의 립글로스를 본인 취향에 맞게 믹스해 자신만의 컬러와 플럼핑 강도로 만들 수 있게 한 것. 사전 예약자를 대상으로 9구 섀도 팔레트를 직접 만드는 체험도 제공했다. 이는 온라인 뷰티 커뮤니티를 통해서 입소문이 났다. 다녀온 사람들이 직접 후기를 남기고, 이를 본 사람들이 또 방문해서 인증 샷을 남기는 선순환이 구축된 것이다.
팝업스토어 구매 고객을 대상으로 혜택을 제공하기도 한다. 퓌는 지난 1월 더현대 서울에서 팝업스토어를 운영하며 '립앤치크’ 제품을 구매하면 제품을 소분한 키 링을 추가로 증정했다. 가방에 작은 액세서리를 매달고 다니는 '백꾸(bag+꾸미기)’ 유행을 타고 키 링은 큰 인기를 모았다. 무료로 증정한 키 링에 웃돈이 얹혀 중고 거래되는 해프닝이 발생했을 정도다. 키 링을 받기 위해서 제품을 구매한다는 사람도 속출했다. 당시 퓌가 판매한 립앤치크 제품은 초도 물량이 모두 완판되면서 '더현대 대란템’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K-뷰티의 인기가 글로벌하게 높아지면서 국내 브랜드들은 해외에서도 활발하게 팝업스토어를 전개한다. 이때도 체험은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다. 믹순은 지난해 12월 미국 뉴욕에서 스킨을 직접 만들어볼 수 있는 체험형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투에이엔 역시 같은 달 일본의 뷰티 성지인 앳코스메 도쿄에서 팝업스토어를 진행했다. 브랜드 필름 속 공간을 일부 재현해 전속 모델인 그룹 레드벨벳 아이린처럼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포토 존도 마련했다. 팝업스토어는 제품뿐만 아니라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는 공간일 때 매력적이다.
연예인보다도 인플루언서
뷰티업계의 주력 유통 채널 중 하나는 인플루언서다. 뷰티 인플루언서들은 직접 제품을 사용 후 장단점과 사용 꿀팁을 전한다. 해당 인플루언서의 구독자들은 브랜드의 타깃 소비자와 맞닿은 경우가 많고, 인플루언서에 대한 충성도가 높아 구매 전환율도 높다. 인플루언서 플랫폼 레뷰가 지난해 국내에서 진행된 약 21만 건의 캠페인을 분석한 결과, 뷰티 부문(30%)이 인플루언서 마케팅을 가장 활발히 활용하는 산업군으로 나타났다. 이는 대기업도 활발히 진행하는 마케팅이기도 하다.
하지만 신생 뷰티 브랜드는 비용 부담으로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고객에게 경험을 제공할 기회가 적다. 인플루언서와의 적극적 협업을 통해 잠재 고객들의 간접 경험 기회를 늘리고자 하는 이유다. 제품 제공에서 나아가 제품 개발 단계부터 손을 잡는 경우도 늘고 있다. 콰티는 지난해 하반기 인플루언서와 함께 신상품 기획, 콘텐츠 개발 등 다양한 마케팅을 펼치는 '콰티스트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무신사의 뷰티 브랜드 오드타입은 5월 뷰티 인플루언서 젤라비, 라이프스타일 유튜버 런업과 함께 신제품을 출시했다.
한편 최근 제품 홍보 콘텐츠나 공동 개발 외에도 뷰티 인플루언서와의 협업 범주가 확장될 기미가 보인다. 이니스프리가 지난해 10월 서울 성수동에서 전개한 '그린티 유니버스 팝업스토어’의 메인 디렉터는 119만 구독자를 보유한 뷰티 크리에이터 레오제이였다. 그는 팝업 기획 단계부터 팝업 존의 콘텐츠 기획, 디자인 등 모든 과정에 참여했다. 자신이 직접 기획한 콜라겐 포토 존에 대한 애정을 SNS를 통해 여실히 드러내기도. 인플루언서들은 트렌드의 최전선에 있는 데다 구독자들의 반응을 늘 꼼꼼하게 살핀다. 제품이나 이벤트 등에 대한 실질적인 니즈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해외에 진출할 때도 현지 뷰티 인플루언서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추세다. 포렌코즈는 지난해 6월 일본 현지에 진출하면서 일본 뷰티 인플루언서들과 제품을 공동 개발했다. 질감과 컬러, 모양, 크기까지 현지인 취향을 저격하기 위해서다. 비히디는 지난해 7월 일본 뷰티 인플루언서 신안나와 함께 일본 이커머스 론칭 행사를 진행한 바 있다.
최근 K-팝과 K-드라마 등의 콘텐츠 인기를 바탕으로 K-뷰티에 대한 관심이 전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코트라(KOTRA)는 '2024년 수출전망 및 지역별 시장 여건’이란 보고서를 통해 2024년 K-뷰티는 한류 효과로 화장품 수출이 10% 이상 증가할 것으로 전망했다. 삼일PwC 경영연구원은 동남아, 일본, 미국 등으로의 K-뷰티 확산세는 인디 뷰티 브랜드로부터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대기업 중심으로 돌아가던 뷰티 시장을 신생 중소 브랜드가 파고들 수 있었던 까닭은 명확하다.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의 입장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듣고, 고려하고, 실천에 옮겼기 때문. 하지만 모든 신규 브랜드가 고객의 니즈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는 지금, 한 끗 다른 마케팅으로 소비자들의 시선을 모았다면 이제는 탄탄한 제품력으로 스테디셀러의 가능성을 입증할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