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느릴 뿐…세상의 ‘경계’를 허물자

신재은 기자 2024. 6. 3.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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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 세상을 바꾸는 정책]700만 추산 경계선지능인, 교육·고용 지원 관련법 제정부터
[편집자주]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역량은 ‘정책’의 기획과 실행 능력으로 평가된다. 한정된 예산으로 얼마큼 효율적인 정책을 펼치느냐에 따라 주민 삶은 크게 달라진다. 우리 동네에 ‘안심가로등’이 설치되는 것부터 출산과 양육 지원까지 모두 정책의 영역이다. ‘체험 세상을 바꾸는 정책’은 기자가 직접 정책 현장을 찾아가는 코너다.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해당 정책의 실효성을 검증한다. ‘더 좋은 정책’을 위해 대안을 제시, 독자들과 정책 대상자들에게 사랑받는 코너로 자리 잡는 게 목표다.

▲서울특별시 경계선지능인 평생교육 지원센터(밈센터) 로비에 적힌 글귀/사진=신재은 기자
‘느려도 괜찮아, 경계를 넘어’
느린학습자, 경계선지능인이라 불리는 사람들. 장애인도 일반인도 아닌 그 경계에서 정책에 소외되고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사회에 융화되고자 느린 발걸음이지만 용기를 갖고 경계를 넘는 이들을 기자가 만났다.

따스한 햇살과 살랑이는 바람이 좋던 5월 16일, 서울특별시 덕수궁 인근에 위치한 ‘서울특별시 경계선지능인 평생교육 지원센터’(이하 밈센터)를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경계선지능인의 건강하고 행복한 삶의 실현을 위한 평생 동반자’, ‘경계선지능 청년 함께 일해요!’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센터 로비에는 ‘경계선지능 청년들의 일 역량 강화 훈련’ 수업을 수강하는 청년들로 북적였다.

꿈을 찾아, 직업을 찾아…‘느린 가르침’이 필요한 경계선지능인
▲디지털 업무 기본 교육을 듣고 있는 경계선지능 청년들/사진=신재은 기자
“저 따라서 문서 작성이 완료되면 동그라미를 그리거나 손을 들거나 시그널을 보내주세요.” “표는 만들었는데 테두리 굵기는 어떻게 조절해요, 선생님?”

기자가 찾은 ‘꽃피우는 강의실’에서는 ‘디지털 업무 기본 교육’이 한창이었다. ‘경계선지능 청년 업무역량 강화 및 일 경험 시범사업’의 일 역량 강화 훈련 수업이다. 이날은 한글과 엑셀 프로그램을 이용해 회사에서 쓰일 법한 문서를 작성하는 교육이 진행됐다.

보통의 문서작성 교육과는 달랐다. 강사는 표를 만들기 위해서 어떤 버튼을 눌러야 하는지, 다르게 변형하기 위해서는 어떤 수치를 조절하면 되는지 천천히 그리고 여러 번 반복해 알려줬다. 2명의 보조선생님은 자리마다 찾아다니며 진도를 따라오지 못하는 청년들에게 천천히 방법을 설명했다.

“괜찮아요. 천천히 하면 다 할 수 있어요.” 보조선생님은 수업 속도를 버거워하며 포기할 것 같은 청년에게 말했다. 보조선생님의 속도에 맞춰 하나씩 작업을 진행하니 예시와 똑같은 문서를 만들 수 있었다. 청년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문서작성 교육과는 분명 달랐지만 공통점도 있었다. 교육(직업훈련)을 이수해 직업을 얻겠다는 의지, 사회에 융화돼 살아가겠다는 결심이다. 교육이 진행되는 밈센터의 권소현 자립지원팀장은 “밈센터를 찾아 교육을 받는 경계선지능 청년들은 자립에 대한 의지가 강하다”며 “일반인에 비해 학습 속도가 느리긴 하지만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 끝까지 해내는 편이다”라고 설명했다.

일 경험 시범사업에서 직업교육을 이수한 30명의 청년 중 6명은 5주의 인턴십을 수행할 예정이다. 일경험 참여수당도 받는다. 그동안 이수한 공통 소양교육과 직업 공통교육, 직무별 교육을 실전에 적용하고 직장 경험을 해볼 수 있다.

“장애인도 일반인도 아니다” 정책소외 대상에 머물러
경계선지능인은 지적장애, 발달장애에 해당하지 않지만 인지능력과 분별력 등의 지능지수가 낮아 학습 및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말한다. 지능지수가 지적장애(70점 이하)와 평균(85점 이상) 사이에 있는 이들이다.

현재 경계선지능인에 대한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지능의 정규분포에 따르면 대한민국 인구의 13.59%로 추정된다. 인구수로 환산하면 약 700만 명의 경계선지능인이 우리 주변에 있다. 하지만 통일된 명칭도, 제대로 된 인식도 부재하다. 권 팀장은 “자녀가 경계선지능인인지 몰랐다가 군대에 가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으며 알게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경계선지능인은 정상보다 낮은 지능으로 사회적 어려움을 겪는다. 학습 실패와 또래관계 부적응, 취업 문제 등 다양하다. 밈센터에서 만난 조경석(가명, 23세) 씨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공부를 따라가기 벅차 자퇴했다”고 말했다. 직장도 오래 다닐 수 없었다. 그는 “바리스타 교육을 받고 카페에 입사했지만 1주일 만에 잘렸다. 3일 만에 퇴사한 적도 많다”고 했다.

밈센터, 생애주기별 경계선지능인 맞춤 지원
▲밈센터 입구 전경/사진=신재은 기자
경계선지능인을 위한 지원센터인 밈센터가 2022년 서울시에 전국 최초로 설립됐다. 2020년 10월 채유미 의원이 발의한 ‘서울특별시 경계선지능인 평생교육 지원 조례’가 추진 근거다.

서울시에 거주하거나 서울 소재의 학교, 직장 등에 소속된 경계선지능 아동·청소년, 청년, 가족, 유관기관 종사자 등이 대상이다. 경계선지능인의 발굴부터 지원체계 구축, 지역사회 인식 전환까지 생애주기별 맞춤형 사업을 진행한다. 경제적 자립을 위해 청년을 대상으로 직업준비교육과 직업소양교육도 운영하고 있다.

센터에서 만난 한 경계선지능인은 “우리에게 맞는 교육을 진행하고 자조모임도 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해를 거듭하며 신규회원 수가 증가하고 수강 대기 인원도 많아지고 있다. 서울에 적을 둔 사람만 밈센터의 회원이 될 수 있어 지방에서 서울까지 이사하는 경우도 생긴다. 권 팀장은 “전북 전주에 거주하는 한 청년은 서울로 상경해 고시원에서 생활하며 밈센터 강의를 들었다. 다행히 교육 이수 후 고향에서 취업했다는 좋은 소식을 전해줘 기억에 남는다”고 설명했다.

밈센터는 경계선지능인에 맞게 교육 횟수를 늘리고 시간도 최대한 확보한다. 경계선지능인의 학습에는 ‘반복’과 ‘시간’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일경험시범사업에 참여한 이지영(33세)씨는 “스스로 학습이 느린 것을 알기에 사무직 취업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고 했다. 그는 “센터에서 진행하는 교육은 설명도 자세하고 보조 선생님들도 챙겨주니 이해하기가 쉽다. 사무직에 도전할 용기가 생긴다”며 웃었다.

소기의 성과도 거뒀다. 지난해 처음으로 진행한 바리스타 자격증(SCA) 취득 직무교육에 참여한 16명 모두 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권 팀장은 “일반인들은 10회 수업에 끝내는 과정을 교육 25회, 실습 25회 총 50회 진행했다”며 “교육의 내재화를 통해 경계선지능인들도 충분히 학습이 가능하다는 자체 평가를 내렸다”고 설명했다.

국가 차원의 정책 부재…법 제정 필요
▲바리스타 자격증 교육과정인 ‘커피랩’ 4기 실습 모습/사진제공=밈센터
현장에서는 경계선지능인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정책과 법 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자치법규정보시스템에 따르면 전국의 경계선지능인(느린학습자) 관련 조례는 79건이다. 하지만 정부 차원의 정책이나 지원은 미비하다.

때문에 경계선지능인 지원은 전국 시·군·구 단위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운영 주체도 심리상담센터, 교육청, 복지관 등 제각각이다. 경계선지능인만을 위한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사업이 진행될 수 없는 이유다.

경계선지능인 관련 법안은 22대 국회를 바라봐야 할 실정이다. 21대 국회는 5개의 경계선지능인 관련 법안을 발의했지만 가결된 법안은 ‘느린학습자(경계선 지능인) 교육지원 종합대책 마련을 위한 촉구 결의안’ 뿐이다. 경계선지능인에 대한 정의를 명확히 하고 이들에 대한 지원사항을 규정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경계선지능인 지원에 관한 법률안’ 등은 소관위에 계류돼 자동폐기됐다.

경계선지능인인 이지영 씨는 “경계선지능인은 새로운 일을 찾기도, 배우기도 쉽지 않다”며 “경계선지능인에 대한 연구가 이뤄져 우리에게 적합한 직무 알선이나 교육프로그램 등을 지원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회복지 전문가는 “경계선지능인이 고용 지원이나 교육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관련 법이 제정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6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신재은 기자 jenny0912@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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