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국민 바라보며 의사봉”… 정치 양극화 속 의회 ‘중심’ 잡다[Leadership]
첫 무당적 의장 이만섭…靑 예산안 날치기 요구 거부 뒤 낙마
의사출신 정의화… 박근혜 정부 노동·경제법안 직권상정 반발
정세균, 교섭단체 회동 정례화… 박병석, 검수완박 중재 견인
쌍특검법 압박속 협치 강조 김진표, 민주당원 거센 공격 받아
오는 5일로 예정된 제22대 국회 첫 본회의에서 22대 전반기를 이끌 국회의장이 선출된다. 지난달 17일 더불어민주당 경선에서 추미애(6선) 의원을 누른 우원식(5선) 의원이 의장 후보로 나선다. 민주당 경선을 두고 정치권에서는 “이번만큼 많은 관심이 쏠린 의장 선거는 없었다”는 말이 나왔다. ‘윤석열 정부와 맞서 싸울 투사형 의장을 원한다’는 민주당 강성 지지층의 요구에 후보들이 선명성 경쟁을 벌인 탓이다. 거야가 예고한 입법 독주에 국회의장까지 가세한다면 22대 국회는 극한의 정쟁으로 치달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새 입법부 수장 선출을 앞두고 헌법과 국회법이 규정한 국회의장의 역할과 의무, ‘협치’를 위해 노력한 역대 의장들의 사례를 정리했다.
◇‘당적 이탈·중립 의무’ 국회의장 역할과 권한은 = 국회의장은 국가 의전 서열 2위로 ‘5부 요인(국회의장·대법원장·국무총리·헌법재판소장·중앙선거관리위원장)’ 중에서도 서열상 맨 윗자리에 놓인다. 입법부 수장으로서 국회 의사일정을 결정하고, 법안 심사 기간을 지정할 수 있는 국회의장은 올해 기준 국회 사무처와 국회도서관·국회예산정책처·국회입법조사처 등에서 근무하는 5680여 명의 인사권을 행사하고 예산 7676억여 원을 관장한다.
지난 2012년 국회선진화법 개정으로 요건이 강화되긴 했으나 법률안을 상임위원회 의결 없이 곧바로 본회의에 올릴 수 있는 ‘직권상정’은 국회의장의 대표적인 권한 중 하나다. 국회법 85조는 ‘천재지변’이나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혹은 ‘의장과 각 교섭단체 대표의 합의가 이뤄진 경우’에 의장이 심사 기간을 지정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과거 ‘3김(金) 시대’에는 대통령이 국회의장을 지명하는 경우가 흔했다.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이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국회의장의 당적 보유를 금지한 국회법(20조의2)이 공포된 것은 2002년 3월(16대 국회)이다. 당시 이만섭 의장은 공포 직후 새천년민주당 당적을 포기했다. 1948년 제헌국회 개원 이래 사상 첫 무당적 국회의장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 전 의장은 당시 언론 인터뷰에서 “청와대와 자기가 속해 있는 당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올바르게 국회를 운영할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을 마련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의사봉을 칠 때마다 한 번은 여당을, 한 번은 야당을 보고, 마지막으로는 국민을 바라보며 양심의 의사봉을 칠 것”이라는 16대 의장 취임사는 여전히 큰 울림을 주고 있다.
◇‘날치기 반대’ 이만섭·정의화, ‘중재 미덕’ 정세균·박병석 = 14대 전반기와 16대 전반기 등 두 차례 국회의장으로 재임한 이 전 의장은 ‘날치기’를 막은 강골 소신파이기도 했다. 14대 국회에서 잔여 임기 국회의장을 맡았다가 청와대의 예산안 날치기 처리 요구를 들어주지 않아 낙마했다. 그의 회고록 ‘정치는 가슴으로’를 보면, 이 전 의장은 재임 중 김영삼 전 대통령이 예산안 강행 처리를 지시했지만 “날치기 처리는 안 된다”며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의료인 출신으로 처음 국회의장직을 맡은 새누리당 출신 정의화(19대 후반기) 전 의장도 날치기에 반발했던 사례로 유명하다. 집무실 앉은 자리 맞은편에도 ‘참을 인(忍)’ 자를 써두고 소통과 타협을 통한 합의 도출을 다짐했다고 한다. 일례로 정 전 의장은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노동과 경제 법안 관련 직권상정을 거부했다. 그는 “직권상정은 국가비상사태에서만 가능하다”며 “내가 성을 바꾸지 않는 이상 직권상정은 없다”고 밝혔다.
정 전 의장은 지난 2015년 이 전 의장 영결식 영결사에서 “‘(이 전 의장께서 제게) 꼭 의장이 되어 우리 국회를 제대로 바꿔보라’며 격려해주신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렇게 홀연히 가셨느냐”고 추도한 뒤 “의장님께서 의장석을 지키셨던 기간, 우리 헌정사의 고질병인 날치기가 사라졌다”고 회고했다. 이 같은 영결사를 두고 당시 날치기를 압박하는 청와대와 새누리당을 향해 자신의 의지를 다시 한 번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여야 대립이 극단으로 치달은 요즘 정치 상황에 비춰 의장에게 요구되는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가 중재자의 역할이기도 하다. 특유의 온화함과 외유내강형 성품으로 ‘미스터 스마일’이라는 별명을 지닌 민주당 출신 정세균(20대 전반기) 전 국회의장은 여야 대치 국면에서 의장의 중재 역할 중요성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대표적으로 그의 재임 기간 국회의장과 교섭단체 원내대표 회동이 정례화됐다. 다만 정 전 의장은 헌정 사상 유일한 국회의장 출신 국무총리가 되면서 삼권분립 훼손 논란을 빚기도 했다.
민주당 출신 박병석(21대 전반기) 전 국회의장도 중재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인물로 꼽힌다. 그는 의장 취임 후 첫 일정으로 원 구성 협상을 위한 여야 원내대표 회동을 주재했다. 처음 여야 원내대표를 대면한 자리에서 그는 “이른 시일 내 합의에 이르지 못하면 의장이 결단을 내리겠다”고 압박하기도 했다. 다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원 구성 협상이 불발되며, 32년 만에 여당이 상임위원회를 독식하게 됐다.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법안 처리 국면에서도 중재안을 제시하며 여야 합의 처리를 위해 노력했다.
박 전 의장은 2021년 민주당이 언론중재법 개악을 시도할 때 여야 합의를 요구하며 본회의 상정을 거부했다. 결국 민주당은 법안 상정 요구를 철회했고 여야는 언론미디어제도개선특별위원회 구성에 합의했다.
◇김진표, 여야 합의 강조에 ‘개딸’ 십자포화…“의회 민주주의 위기” 직언 = 21대 후반기 입법 수장으로 지난달 29일 퇴임한 김진표 전 의장은 임기 동안 여야가 ‘노란 봉투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2·3조)’과 방송 3법, 쌍특검법(김건희 여사 주가조작 특검법·대장동 50억 의혹 클럽 특검법) 등 쟁점법안을 놓고 대치할 때마다 협치 정신을 되새길 것을 주문한 의회주의자였다. 의장의 중립 의무에 관한 국회법 정신에 따라 민주당 출신임에도 민주당 편을 ‘화끈하게’ 들어주지 않은 탓에 친정의 정치인들과 강성 지지층으로부터 공격을 받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 4월 말 민주당 의원 30여 명은 “5월 2일 채 상병 특검법 처리 등을 위한 본회의를 열지 않으면 김 의장의 해외 순방을 저지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았고, 당 홈페이지에는 김 전 의장을 향한 원색적 비난과 함께 “당원들의 생각을 반영해줄 의장을 선출하기 위해 기명 투표를 해달라”는 강성 지지층의 청원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 같은 당내 갈등과 소란은 조정식·추미애·우원식·정성호 등 22대 국회 전반기 의장 후보들의 ‘선명성 경쟁’으로 이어졌다. 의장 후보들이 일제히 ‘당심’을 받들어 “의장이 되면 기계적 중립에서 탈피하겠다”고 선언하자 김 전 의장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조금 더 공부하면 그런 소리를 한 사람 스스로 부끄러워질 것이다. 한쪽 당적을 계속 가지고 편파적인 의장 역할을 하면 그 의장은 꼭두각시에 불과할 것”이라고 쓴소리를 날렸다. 그는 지난달 28일 제76주년 국회 개원 기념식에서 “대결 중심과 정치 양극화가 팽배해진 정치 풍토에서 대의민주주의 위기가 커지고 있다는 우려를 금할 수 없다”며 “22대에는 대화와 타협으로 진영·팬덤 정치의 폐해를 극복하고 살아 숨 쉬는 국회를 만들어 달라”는 당부를 남겼다.
나윤석·윤정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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