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빈의 플랫폼S] 아이들까지 동원한 동서독 '삐라 전쟁' 결말은

이광빈 2024. 6. 3.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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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독의 '체제 선전' 삐라 도발…서독은 '이에는 이' 대응
서독군, 민간인 복장하고 아이들 대동해 '비밀 살포'
동독은 '열세'·서독은 언론에 '들통'…양측, 주고받기식 타협 끝에 중단

[※편집자 주: 지속가능한(sustainable) 사회를 위한 이야기들을 담아낸 '플랫폼S'입니다. 지속가능과 공존을 위한 테크의 방향성과 기후변화 대응, 사회적 갈등 조정 문제 등에 대한 국내외 이야기로 찾아갑니다.]

'대남 전단' 잔해 [연합뉴스 자료사진]

(서울=연합뉴스) 이광빈 기자 = "이게 우리 서독군이 동독에 보내려 한 '삐라'라고?"

독일 분단기인 1965년 초. 동독과 가까운 서독의 작은 마을 알텐부어쉴라에 '삐라'(전단)를 가득 담은 풍성 열다섯 개가 떨어졌다. 애초 동독 지역으로 흘러갈 풍선이었으나,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되돌아왔다.

마을 장터에 모여있던 주민들은 한눈에 동독 지역으로 보낼 선전·선동용 전단임을 알아차렸다. 이 소식은 언론으로 흘러 들어갔다.

같은 헤센주(州) 프랑크푸르트의 한 지역방송국은 이 풍선을 동독 지역으로 보내려던 주체가 서독군이라고 같은 해 3월 보도했다.

오래전부터 서독 정당들이 전단을 동독으로 보내기도 했으나, 연방정부 차원의 조직적인 살포 사실은 처음으로 드러났다. 그때까지 서독 연방정부는 '삐라 살포'를 비밀에 부쳐왔었다. 라인란트팔츠주와 니덕작센주에 있는 전담 부대가 이 작전을 수행했다.

서독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서독에선 동독이 풍선에 선전용 전단을 실어 날리는 것에 대해 냉전의 갈등을 부추긴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데 서독 정부마저 이런 갈등 유발의 한 주체라는 점이 드러나면서 사회적 비판이 거세게 일어났다.

책 '힙베를린, 갈등의 역설'에 서독군이 아이들을 동원해 동독으로 전단 풍선을 보내는 장면 ※무단 복제 및 배포 금지

서독군이 동독으로 전단을 대량 살포하기 시작한 것은 수년 전부터였다. '삐라 도발'은 동독이 먼저 했다. 동독은 1961년 베를린 장벽 설치를 전후로 서독으로 전단 살포를 강화했다. 장벽 설치에 대해 서구 사회의 비판이 거센 데다, 동베를린 지역을 중심으로 내부 불만이 나오는 가운데 체제 선전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

서독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심리전 부대 등을 동원해 비밀리에 동독으로 풍선을 대량으로 띄워 보냈다. 서독군은 정부 차원의 작업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민간인 복장을 한 데다, 아이들까지 대동해 '삐라 살포' 작전을 벌였다. 아이들에게 준 대가는 사탕이었다. 서독군의 전단 살포 경위 등은 프라이부르크대 연구자료와 헤센주 역사정보 시스템 등에 남아 있다.

'이에는 이' 방식으로 동서독 간 '삐라 전쟁'은 시간이 갈수록 격렬해졌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전세는 서독으로 확실히 기울었다. 기술력에서 동독이 뒤졌다. 서독이 풍선을 더 멀리, 인구밀집 지역으로 더 정확하게 보냈다.

그러나 서독 당국은 알텐부어쉴라에서 전단 살포가 들통나면서 고민이 깊어졌다. 시민사회와 언론에선 비판 여론이 나날이 커졌다. '라인강의 기적'을 이루던 서독에선 이미 동독과의 체제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자신감이 차오르던 시점이었다. 같은 해 서독 연방의회도 이 문제를 다뤘다.

지난 2020년 탈북단체가 북한으로 보내려다 되돌아온 대북전단 살포용 풍선 [연합뉴스 자료사진]

동서독 간의 '삐라 전쟁'은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과정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동독 당국은 수세에 몰린 '삐라 전쟁'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고, 서독 당국도 여론의 비판이 부담이었다.

기본조약 체결 전 벌어진 막후 협상에 서독에선 대동독 교류·협력 정책인 '신동방정책'의 설계자 에곤 바가 나섰다. 동독에선 서독통인 미하엘 콜이 바의 상대였다. 양측은 치열한 논의 끝에 상호 살포 중지에 합의했다. 알텐부어쉴라에서 서독 당국의 전단이 발견된 지 7년 만인 1972년 초여름의 일이었다.

'주고받기'가 이뤄졌다. 서독은 동독의 체제선전 방송인 935군사방송의 중단을 요구했고, 동독은 이를 받아들였다. 기본조약을 통해 서독은 민간교류 확대와, 동독으로의 언론 특파원 파견 등을 얻어냈다.

한반도와 당시 동서독의 지정학적 환경, '삐라 살포'를 둘러싼 배경 등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독일의 60∼70년 전 기억이 최근 '오물 풍선'을 둘러싼 한반도 상황에 해법을 제시할 순 없다.

다만, 과거 독일에서 시민사회와 양 정부의 의지가 반영된 복합적인 요인 속에서 극심한 대치 및 갈등 상황이 풀렸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를 분단국가 갈등 관리의 성공 사례로 찬찬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lkbin@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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