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아파봐야 알까 [한겨레 프리즘]
하어영 | 전국팀장
별일 없이 산단다. 1만여명 전공의가 병원을 비운 지 100일이 넘었는데. 이른바 ‘빅5’ 대형병원이 일주일에 하루씩 휴진을 하겠다고 한 지도 한달째인데. 정부는 “의료대란을 피하고 있다”(5월29일 브리핑)고 한다.
정부의 영혼 없는 호언장담에 근거가 없진 않다. 응급실 전체 408곳 중 96%인 390곳이 병상 축소 없이 운영된다. 전체 종합병원 중환자실 입원 환자는 7100명으로 평상시 96% 수준이다. 그런데 아니다. 당해보니 알겠다, 지금 지옥이다.
“제가 전문적으로 분석할 수는 없지만요. (수술)한 부위만 봤을 때는 이상 소견은 없어 보이고요.”
5월 초. 4년6개월을 믿어온 의사에게 자신이 “전문적이지 않다”는 ‘용감한’ 고백을 들었다. 투병 중인 칠순 어머니의 보호자로 찾은 서울 한 대형병원에서였다.
“원래 영상 분석하는 (의사) 선생님이 협진하시는데요. 일이 몰려서요.”
무능도 똑 부러지는 말과 섞이니 납득이 된다. “이상 있으면 따로 연락 드릴게요, 됐죠?” ‘따로 연락’이라니, 이럴 거면 왜 불렀나. “그럼 연락은 언제쯤….” 환자(보호자)는 조심스럽다. “두어달 뒤쯤? 연락이 없으면 좋으신 거고요.” 결국 말문이 막혔다.
그때 알았다. 아파보지 않으니 그렇다. “대란을 피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프지 않아서다. 이날 진료는 겉으론 ‘정상’이었다. 진실은 환자(보호자)만 안다. 혼란 속에 어렵게 잡은 진료, 전문적이지 않다는 고백,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통보까지…. 정상적인 건 하나도 없었다.
“난 그래도 검사도, 진단도 다 받았잖여. 아랫집은 수술도 미뤄졌다는디.”
20여일이 지났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하지만 불안은 계속된다. 어머니가 홀로 병을 돌보는 고향은 이른바 ‘소멸위험 지역’이다. 잔병치레도 안 된다. 병원을 대신하는 보건지소들이 전공의 파업으로 공보의가 파견을 나가 일주일에 이틀은 문을 닫는다.
내 고향만이 아니다. ‘소멸위험’ 지역은 전국에 산재해 있다. 전국 읍·면·동 3553곳 중 1067곳에 이른다.(2021년 한국고용정보원 자료) 한겨레가 대표적인 소멸위험 지역으로 꼽아 2021년 10월18일치 1면으로 보도했던 충남 서천군과 경북 군위군의 사정을 다시 들었다. 두곳 모두 보건지소가 근무일을 줄였다. “답답해도, 별수 있나요.” 서천군에 사는 70대 ㄱ씨는 화가 나 있다. 일주일에 겨우 두번 연다. 그나마 한번은 오전만이다. 그는 “코로나 때도 그러더니, 무슨 일만 터지면 시골 의사들부터 빼가는 거, 이젠 좀 괘씸하다”고 했다.
5월30일 밤 9시, 의사들이 모였다.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한국 의료 사망선고의 날’ 촛불집회였다. 무능한 정부를 탓하는 의사들의 목소리가 높고 날카로웠다. 의대 정원 증원을 “의료 농단” “교육 농단”이라고 했고, “지금 정부는 ‘빨갱이’나 하는 짓을 한다”고도 했다. 쏟아내는 말들은 어지러웠지만, 예상을 벗어나진 않았다. 집회 막바지, 젊은 전공의가 나서기 전까진 그랬다. “‘바이털 뽕’(생명을 살리면서 느끼는 희열)에 취해 응급의학과를 택한 ‘김아무개’입니다.” 전공의의 등장에 박수가 터져나왔다. “석달째 이어오는 지난한 싸움에서 정부도, 의료계도 국민에게 신뢰를 잃었습니다.” 면전에서 비판하는 결기에 집회장이 차갑게 식었다. “아버지는 말기 파킨슨병입니다. 최근 뇌경색으로 위급해 급히 대학병원으로 갔는데, 입원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7년째 다녔던 곳인데 말입니다.” 그는 ‘대란’을 피하지 못하고 있었다.
“보호자로 겪어보니 알겠습니다. 이제 2천이란 숫자에 집착하지 맙시다. 이젠 환자와 보호자, 언젠가 병에 걸릴 수 있다며 걱정하는 국민들을 우리 편으로 만드는 방법을 우리가 정부보다 먼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하지만 결국, 다 아파봐야 깨닫게 될까. 이날 의사들은 동네 병원 개업의까지 참여하는 큰 싸움을 예고했다.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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