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살만의 네옴시티 위기설, 진실 혹은 거짓 [비즈니스포커스]
예상된 ‘규모 축소’, 국내 건설사 손실로 연결 안 될 것
‘오일머니’의 중심, 중동 최대 산유국, 고속 성장기 한국 건설사의 최대 발주처, 왕족이 엄청난 부(富)를 소유한 나라. 통상 사우디아라비아를 떠올렸을 때의 이미지는 사막의 천연자원이 창출하는 엄청난 자산과 연관돼 있다.
막연히 ‘부자 나라’로만 여겼던 사우디가 최근 위기설에 시달리고 있다. 왕위계승자이자 실권자인 무함마드 빈 살만(MBS)이 추진하던 일명 ‘네옴시티’ 개발사업이 난항을 겪고 있다고 알려지면서부터다.
네옴(NEOM) 프로젝트는 석유 의존 경제에서 탈피하기 위한 경제개혁 정책, ‘사우디아라비아 비전 2030’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다. 이집트와 맞닿은 북서부 타부크주 홍해 끝자락 2만6500㎢ 면적에 저탄소 스마트시티를 건설하는 사업이다.
국내에선 해안가에서부터 이 신도시를 가로지르는 초대형 건물, ‘더 라인(The Line)’ 조감도로 유명하다. 더 라인은 500m 높이의 첨단 건축물이 200m 간격으로 양쪽에서 170㎞나 직선으로 이어지며 지하터널과 고속철도를 통해 넓은 내부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더 라인의 공식 사업비 규모는 총 5000억 달러, 계획대로 완공된다면 실제로는 1조 달러가 투입될 것으로 예상됐다. 지난해까지 ‘네옴시티 특수’를 기대하며 국내 기업과 기관들이 사우디와 수십조원 규모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기도 했다.
그런데 최근 주요 외신은 네옴 프로젝트 규모가 대폭 축소됐다고 보도했다. 블룸버그는 2030년까지 150만 명을 입주시키겠다는 더 라인의 1단계 사업 목표치가 5분의 1인 30만 명으로 줄었다고 밝혔다. 총 170㎞ 중 일단 2.4㎞ 구간만 지어지게 됐기 때문이다.
사업이 축소된 배경으로는 사우디 정부의 자금난이 꼽힌다. 사우디 공공투자펀드(PIF)는 아부다비 무바달라 국부펀드 등과 함께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이 이끄는 1조원(조성자금 기준) 규모 비전펀드에 출자했지만 비전펀드가 3년 연속 적자를 기록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우디 국영석유회사 아람코가 100억 달러(약 13조6000억원) 규모 지분을 추가 매각한다는 보도도 나왔다. 젊은 지도자 빈 살만과 자원부국 사우디에 대한 환상이 걷히며 네옴 프로젝트와 연관된 국내 기업들이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그러나 국내 기업들과 중동 전문가들은 네옴 프로젝트 규모 자체가 애초에 부풀려진 측면이 컸다고 보고 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사업이 계획보다 축소되거나 장기화할 것이 이미 예상됐으며 해당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빈 살만의 권력이 지속되는 한 프로젝트 역시 지속 추진될 것이라는 평이다. 네옴시티를 비롯한 비전 2030 사업이 빈 살만의 정치적 입지 강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분석대로라면 국내 건설업계에 미칠 파장 역시 크지 않을 전망이다.
탄탄한 빈 살만 입지, 네옴시티 지속될 것
비전 2030이 처음 추진되던 시기는 2016년이다. 2015년 빈 살만의 아버지인 살만 빈 압둘아지즈 왕자가 왕위를 이으면서 빈 살만은 국방장관에 올랐다.
그간 사우디 ‘형제 승계’ 원칙에 따르면 국왕의 동생인 무크린 빈압둘아지즈 알사우드가 다음 왕위를 승계해야 했다. 하지만 무크린 빈압둘아지즈 왕세제는 물론 사망한 전 왕세제 나예프 빈압둘아지즈의 아들이자 현 국왕의 조카로서 왕세자로 임명됐던 모하마드 빈나예프 알사우드 내무장관 역시 공적 지위를 박탈당하면서 현 국왕의 아들인 빈 살만이 왕세자가 됐다.
실권을 잡은 빈 살만에겐 과제가 있었다. 자원 집중도가 높은 사우디 경제 체질을 바꾸는 한편 그 성과를 바탕으로 왕위계승자로서 정당성을 다지는 것이다.
특히 빈 살만은 아랍에미리트(UAE)의 두바이를 모델로 삼아 신도시 사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자원 수출이 대부분인 경제구조에서 비석유 경제의 비중을 높이는 동시에 버젓한 대도시를 조성해 글로벌 기업들의 중동지사를 자국에 유치하려고 한 것이다.
랜드마크 ‘부르즈 칼리파’로 알려진 두바이는 7개 토후국 연합인 UAE의 최대 도시다. 북부 해안에 위치했다는 강점을 살려 2000년대 초부터 대도시 건설사업을 펼쳤다. 2007~2008년 사이 뉴욕발 금융위기가 세계를 덮치며 두바이 건설 프로젝트가 위기를 맞았지만 UAE 내 맹주인 아부다비와 다른 토후국들의 도움을 받아 결국 글로벌기업들의 중동 허브 역할을 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통해 두바이가 건설 및 부동산개발, 관광사업 등을 강화하면서 UAE 경제의 비석유 부문 비중은 70%를 넘기게 됐다. 외국인 직접투자 역시 2022년 사상 최고치인 227억 달러를 기록했다. 이 같은 비석유 산업의 중요성은 미국 셰일가스의 등장과 수년간 지속될 유가하락, 저탄소 시장 확대 등으로 점차 중요성이 커졌다.
기존 왕위계승 구도를 뒤집고 왕위계승자가 된 빈 살만으로선 자기 입지를 다지고 내부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대내외적 성과가 필요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가시적인 건설 프로젝트를 통해 수니파 맹주인 자국을 중동 경제 허브로 도약시키는 것만 한 묘책이 없었다는 것이다. 올해 1월 사우디는 중동지역본부 유치 정책을 발효해 중동 지역에 법인이나 지사를 2개 이상 낸 기업이 자국 내에 중동지역본부를 설립하지 않을 경우 자국에서 발주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하기도 했다.
비전 2030 프로젝트는 이 같은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됐다. 정치 선전에 활용된 만큼 초기에 규모 면에서 과장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연구센터장은 “비전 2030은 정치적인 목적에서 추진된 측면이 크기 때문에 규모가 축소된다고 하더라도 소기의 목적이 달성된다면 결국 성공한 셈”이라고 분석했다.
장 센터장은 “사우디가 산업구조를 다양화하는 등 큰 변화가 필요한 시점은 맞으며 다른 왕자들이 불만 세력을 형성하더라도 당장 빈 살만 왕세자처럼 나서서 이 같은 변화를 추진할 만한 사람이 없다”며 “네옴시티를 추진하는 왕세자의 권력이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거품 꺼진 신도시 사업 ‘오히려 호재’
국내 건설업계에선 지난해 ‘네옴시티 붐’이 일었던 시점부터 지금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특히 ‘더 라인’ 관련해서는 “건설 당시 전국의 자재와 인력이 모였던 잠실 롯데월드타워 높이의 건축물 두 채를 서울에서 강릉까지 짓자는 것”이라며 “현실성이 전혀 없다”는 말이 돌았다.
이 때문에 네옴시티 사업 규모가 축소됐다는 소식에 대해 반기는 여론도 있다. 신기루 같았던 개발사업이 실현 가능한 규모로 현실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건설사 관계자는 “국내 회사들이 두바이 건설 프로젝트도 많이 수주했었는데 두바이 프로젝트는 대체로 현실성이 있었던 반면 사우디 네옴시티 계획은 그렇지 않았다”며 “일종의 구조조정이 필요했던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국내 건설사들은 최대 발주처인 사우디 등 중동 수주가 필요한 상황이라 철저히 선별 수주에 나선다는 전략이다. 국내 건설사들은 이미 수십 년간 중동 국가들을 상대해본 경험이 많은 데다 금융위기 이후 현지에서 플랜트 공사비를 떼이는 등 어려움을 겪어봤다. 두바이 역시 2009년 당시 모라토리엄(채무지불유예)을 선언하기도 했다.
현재 네옴시티 관련 MOU를 맺었던 건설사 중 실제 계약을 체결해 착공에 들어간 곳은 삼성물산과 현대건설이 유일하다. 양사는 지난해 더 라인 지하를 잇는 터널의 4·5공구(28km)를 착공한 바 있다. 도급비는 1조5000억원 규모다. 삼성물산과 현대건설은 “터널공사는 네옴시티의 인프라를 조성하는 사업으로 위험성이 없는 사업”이라며 “다른 구간이 발주되면 추가 수주에 나설 것”이라는 입장이다.
비전 2030에는 네옴시티 외에도 다양한 메가 프로젝트가 포함돼 있다. 쌍용건설은 그중 사우디 수도 리야드에 여의도 6배 크기(13.4㎢)로 조성되는 세계 최대 도심형 공원사업 ‘킹 살만 파크’ 공사 입찰에 참여할 계획이다. 쌍용건설은 싱가포르 랜드마크인 ‘마리나베이 샌즈’를 완공한 바 있다.
쌍용건설 관계자는 “킹 살만 파크에 조성될 호텔 및 리조트, 조경 공사 등 입찰에 참여할 것”이라며 “국내 건설사들은 중국과 달리 정부 투자를 통해 공사를 수주하기는 어렵지만 특수건축물 분야의 시공 능력을 바탕으로 난이도가 높은 공사를 수주할 수 있을 전망”이라고 설명했다.
민보름 기자 brm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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