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상논단]철 지난 남북한 삐라전
北, 심리전 넘어 오물까지 투척
냉전시대로 회귀···국제적 망신
남북합의 깨고 긴장고조 악순환
한일중회담 계기 北 설득 필요
2차 세계대전 시기 심리전은 중요한 군사 수단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전후 냉전 시기 상대방 체제를 격하하고 자신들의 체제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전단·신문·라디오 등 다양한 선전 수단이 동원됐다. 전쟁과 냉전의 한복판에 있었던 우리 역사 속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삐라’는 해방 공간 속에서 극단적인 이념을 가진 개인이나 단체에 의해 사용됐다. 6·25 전쟁 중 유엔군과 북한군은 수십억 장의 삐라들을 적대 지역에 살포했다. 분단 이후 남북 체제 대결 시기 동네 어귀나 뒷동산 같은 곳에서 북한이 살포한 삐라들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상대방의 체제를 부정하고 내부를 이간하기 위해 만든 삐라들은 유치한 그림과 선정적인 사진, 자극적인 글자들로 가득했다. 1992년 남과 북은 고위급 회담을 통해 상호 비방을 중단하기로 합의했다. 2004년 남북 장성급 회담 이후 심리전이 중단되기도 했다.
삐라는 냉전 시대의 유물이다. 상호 적대와 증오의 상징이기도 하다. 냉전의 유물이 다시 남북 간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심지어 오물과 쓰레기로 둔갑했다. 일부 탈북단체는 누가 보아도 북한 지역까지 날아가지 못하는 대북 전단 살포를 재개했다. 북한은 그에 대응한답시고 오물과 쓰레기를 풍선에 날려 보내고 있다. 유치하고 낯 뜨거운 행태들이며 국제적 망신이다. 1950년대 냉전 시기 서방은 동구 공산권 국가들을 대상으로 풍선을 이용한 체제 선전을 전개했다. 풍선에 공산 정권과 지도자에 대한 비판적 정보를 담은 전단을 체코·헝가리·폴란드 등으로 날려 보냈다. 체코는 자국 내 유입되는 풍선으로 항공기가 추락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영토주권을 침해한다는 논거로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에 문제를 제기했다. 서방단체들은 ICAO의 자제 요청 결의안에 따라 풍선 살포 행위를 중단했다. 냉전의 한복판에 있었던 당시에도 이성적 판단이 작용해 풍선 살포가 중단됐다.
지난 문재인 정부는 접경 지역 주민들의 생명과 안전에 지장을 초래하는 대북 전단 살포 행위를 규제했다. 윤석열 정부 출범 후 지난해 9월 헌법재판소는 대북 전단 살포를 규제한 조항이 표현의 자유를 지나치게 제한해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단했다. 대북 전단 살포와 긴장 고조의 악순환이 다시 현실화되고 있다. 헌재의 결정에 토를 달 생각은 없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담화를 통해 우리와 똑같이 표현의 자유 운운하면서 조롱하는 것을 보니 어찌하여 남북 관계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북한은 지난해 말 당전원회의를 통해 남북 관계를 적대적 국가 관계로 규정했다. 민족·평화·통일이라는 용어를 삭제하고 통일전선부를 대적지도부로 축소 개편했다. 적대적 2개 국가론을 고착화하기 위해 헌법화를 예고하고 있다. 한류 등 외부 사조의 유입을 통제하면서 체제 안정화에 주력하고 있는 북한의 입장에서 대북 전단이 달가울 리 없다. 남과 북은 냉전으로 회귀해 볼썽사나운 국제적 망신 행위를 중단하고 대화와 협력의 장으로 복귀해야 한다. 우리가 전단을 살포하고 확성기를 재개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북한이 체제 대결에 몰두하지 않고 개혁·개방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환경과 여건 만들기가 시급하다.
흔들림 없는 굳건한 안보도 평화지만 흔들림 없는 굳건한 평화 역시 안보다. 평화를 지키는 노력 못지않게 평화를 만드는 노력을 전개해야 한다. 한반도 주변국들 어느 나라도 한반도 분단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지 않는다. 한일중정상회담과 같은 계기를 만들었다면 이들을 활용하고 북한을 설득하는 지혜를 모아야 한다. 북한과의 정상회담을 위한 일본의 움직임들이 여기저기서 목도된다. 지난해 남북 교역이 사상 처음 제로이고 4년 넘도록 남북 간 인적 왕래는 전무하다. 남과 북은 서로에게 상처만 주는 옹졸한 체제 대결을 중단해야 한다. 1970년대 동방정책을 펼친 서독 총리 빌리 브란트는 “평화가 전부는 아니지만 평화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고 했다. 문제의 해법은 대화하면 평화가 보이고 대결하면 전쟁이 보인다는 동서고금의 교훈 속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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