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원에 막혀 송전망 건설 지연... 전기가 태백산맥 못 넘는다

조재희 기자 2024. 6. 3.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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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배전망의 전력난 경고] [1]
2일 경기도 고양시에 세워진 한 송전탑의 모습. / 장련성 기자

지난달 31일 경기 가평군에 있는 한전 신가평변환소 건설 현장. ‘한전은 주민과 상생한다더니 주민을 살생하고 있다’ ‘변환소 건설 계획을 즉시 백지화하라’는 내용이 적힌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 있었다.

이곳은 경북 울진에 있는 신한울 원전 등에서 만든 전기를 수도권 곳곳으로 보낼 핵심 송배전 시설의 건설 현장이다. ‘탈원전’으로 공사가 중단되는 우여곡절을 겪은 신한울 3·4호기가 완공 후 생산할 전기도 이곳을 거치게 된다. 2010년 계획 수립 당시 2019년부터 가동할 계획이었지만, 공사는 지난해 8월에야 시작됐다. 계획 때부터 따지면 15년이 됐고, 당초 준공 시점에서는 5년이 지났지만, 현재 공정률은 8%다. 한전 측은 밤샘 작업을 해서라도 2026년 8월인 완공 시점을 맞추겠다는 입장이지만, 현장에서도 이를 믿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동해안에서 이곳을 잇는 송전선로 공사는 환경 단체와 10개 시군구 지역 주민의 민원이 쏟아지며 송전선 위치 선정에만 6년이 걸렸고, 변환소 공사도 함께 늦어졌다. 지자체가 각종 인허가권을 가졌다 보니 조그마한 민원이라도 들어오면 표를 의식한 지자체장은 제동을 걸고, 민원 해결부터 공사까지 모두 한전이 책임을 져야 했다.

계획 초기부터 송배전망의 핵심인 변환소 설치를 반대해온 지역 주민들은 협상 끝에 공사가 시작된 뒤에도 ‘상생’을 명목으로 잣, 고추, 쌀, 목이버섯 등 농산물을 처리할 가공시설과 다리(인도교) 건설 등을 요구하며 공사를 막아서고 있다.

인공지능(AI) 확산과 그에 따른 데이터센터 확대,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전기차 보급 등으로 전력 수요가 폭발하는 상황에서 송배전망이 ‘심각한 복병’으로 등장하고 있다. 각국이 미래 첨단 산업을 선점하기 위해 전력 생산에 총력을 기울이는 상황에서 생산한 전기를 수요지로 보낼 송배전망 구축이 가장 큰 걸림돌로 떠오르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현재와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원전 15기에 이르는 전력 설비가 전기를 보낼 방도가 없어 멈춰야 할 형국이다. 전력망 구축이 갈수록 더뎌지면서 ‘송배전망발(發) 전력 대란’은 우려를 넘어 곧 현실이 될 것이란 전망이 커진다.

그래픽=이철원

2일 본지가 지난해 확정된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과 한국전력거래소의 ‘2023년 발전소건설사업 추진현황’ 등을 분석한 결과, 2036년까지 강원과 영호남 등 비수도권은 전력 설비가 35GW(기가와트) 늘어나지만, 이 전기를 쓸 비수도권의 수요는 15GW 증가하는 데 그치게 된다. 수도권으로 향하는 송배전망이 확충되지 않으면 최대 20GW에 이르는 설비가 가동을 못 할 상황에 놓일 가능성이 크다. 20GW는 1.4GW급 신형 원전 15기에 이르는 규모다. 이미 동해안에 있는 석탄발전소와 원전에서 만든 전기가 태백산맥을 제대로 넘어오지 못하고, 호남 지역에서 생산한 전기가 쓰일 곳이 없어 태양광 발전이 잇따라 가동을 멈추는 상황에서 송배전망 문제가 더 심각해지게 되는 것이다. 특히 지난달 31일 발표된 ‘제11차 전기본’에서 원전과 재생에너지 등 발전소 건설 규모가 더 늘어나게 되면서, 지금 주어진 시간을 놓치면 손을 쓰기 어려워질 순간을 맞게 된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그래픽=백형선

◇120조원 들인 발전소 놀릴 판국

업계에 따르면 원전은 통상 1.4GW 하나 건설에 5조원, 석탄발전소는 1GW에 2조5000억원이 든다. LNG(액화천연가스) 발전소는 1GW당 1.25조원으로 추정하고, 태양광도 비슷하게 든다. 먼바다에서 전기를 만들어야 하는 해상 풍력은 원전과 비슷하게 1GW당 5조원을 웃돈다. 지난해 말 기준 2036년까지 전국에서 건설·계획 중인 발전소는 원전 5기, LNG발전소 23기 등으로 이 같은 추정 건설비를 감안하면 만들어 놓고도 가동할 수 없는 발전기의 건설비는 120조원에 이른다. 현재 국내에서 가동 중인 원전(26기)만큼을 지을 수 있는 자금을 투입해 놓고서도, 하릴없이 놀려야 하는 것이다.

수도권의 전력 수요가 폭증하는 가운데 ‘탄소 중립’ 이슈로 몇몇 석탄발전소 등 기존 수도권의 발전 설비가 폐쇄되면서 강원·영남·호남 등 비수도권에서 들여와야 할 전기는 더욱 늘게 된다. 송배전망 증설이 더욱 절실해진다는 얘기다.

그래픽=김현국

◇선 없어 전기 못 만드는 사례 속출

부족한 송배전망 문제는 이미 곳곳에서 발전소 가동 중단이나 축소 등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경기 여주에 있는 1000MW(메가와트)급 여주복합화력발전소는 올 초부터 가동률이 30% 수준에 그치고 있다. 강원도에서 신가평변환소를 거쳐 수도권으로 보내야 하는 신규 송전망 구축이 늦어지면서 기존 선로가 과포화된 탓이다. 현재 동해안의 원전과 석탄화력발전소에서는 생산한 전기를 수도권 직통은 물론 충청을 거쳐서 보내는 선로까지 꽉꽉 채워 전기를 보내면서 그 길목에 있는 여주발전소가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완공된 지상(地上) 송전선로 길이는 수km에서 수십km인 단거리 위주로 60km에 그친다. 2010년대 초반 전국적으로 관심이 쏠렸던 ‘밀양 송전탑 사태’를 거치며 송배전망 공사가 각종 민원의 중심이 되면서 공사 속도는 크게 늦어졌다. 밀양 송전탑이 포함된 신고리-북경남 송전선로가 완공된 2014년까지 해마다 100km 이상 완공되던 송전선로는 이듬해부터 두 자릿수로 떨어졌다.

송배전망은 전국이 촘촘하게 연결돼 있다 보니 어느 한 곳에서만 문제가 일어나도 대정전과 같은 걷잡을 수 없는 사태를 일으킬 위험성이 크다. 불과 몇 초의 정전으로 수백억원의 손실을 보는 반도체 공장은 물론, AI의 확산 속에 잠깐의 전력 공급 차질도 산업과 일상에 큰 문제를 낳을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송배전망 투자를 확대하고, 건설에 속도를 내 문제를 미리 없애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박종배 건국대 교수는 “송배전망의 경제적 가치가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커졌다”며 “원활한 전기 공급이 산업 경쟁력을 좌우하는 상황에서 최대한 송배전망을 빨리 깔 수 있는 방도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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