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태우의 '버티기'로 지킨 300억이 1.3조로... 그 돈, 환수할 수 있을까?
수천억 추징금 내면서도 지킨 300억 존재
"사회정의에 어긋나" 불법 자금 환수 주장
본인 사망·소급적용 불가... 추징은 어려워
"노태우가 준 비자금으로 그 딸이 이득을 봐도 문제다. 여기에 정의가 어디 있나?"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 소송 항소심 판단에,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의 존재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과연 '이번 판결이 사회 정의에 부합하는지'를 두고 논란이 거세다. 노 전 대통령이 뇌물죄로 징역 17년을 받은 사실을 감안하면 그 비자금 역시 '검은돈'이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은데, 그 돈을 딸의 '지참금'으로 인정해 대기업 확장에 따른 과실을 자식에게 몰아주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를 문제 삼는 여론이다.
다만 이런 지적 자체는 가능할 수 있어도, 법적으로 이를 국가에 환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자금 출처를 묻지 않는 가사소송의 특성이나 사건 자체가 매우 오래됐다는 점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는 추징할 방도가 없다고 보는 게 법조계 중론이다.
2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고법 가사2부(부장 김시철)는 노 전 대통령이 1991년 최 회장 부친인 최종현 전 회장에게 지원한 자금의 불법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이를 재산 분할의 핵심 요소로 고려했다. 재판부는 "관련 사정이 (일찍이) 드러났다면 정부가 최 전 회장을 상대로도 추심 소송을 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부정축재 가능성이 농후한 돈을 재산 분할 대상에 포함시킨 법원의 논리가 일견 납득되진 않지만, 이는 가사재판의 특성에서 기인했다는 게 법조계 설명이다. '관계 해소'가 쟁점이 되는 이혼 소송의 목적상 재산 분할에 있어서도 양쪽 기여도만 따질 뿐, 설사 재산 일부가 범죄수익으로 의심된다 할지라도 재판부 직권으로 형사 책임까지 물릴 수 없다는 것이다.
가정법원 판사를 오래 지낸 이현곤 변호사(법률사무소 새올)는 "재산 분할에선 형성 과정의 불법성을 묻지 않는 게 원칙"이라며 "이를 고려하는 순간 '한쪽이 불법 자산을 독식하는 것은 괜찮냐'는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짚었다. 이혼 전문인 김신혜 변호사(법무법인 한경)는 "범죄수익 납부를 명령하는 추징도 형벌의 한 종류이므로 (가사재판과) 별도의 형사재판을 거쳐야 하는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비자금의 환수 여부를 결정 짓는 것은 이혼 소송 영역 밖이라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노 전 대통령 일가를 상대로 범죄수익을 추징하는 소송을 새로 진행하는 것은 가능할까. 여기선 노 전 대통령이 사망해 공소권 자체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문제가 된다. 1990년대에 이미 노 전 대통령과 선경그룹(SK 전신)의 금전 고리를 찾기 위한 대대적인 수사에서도 이 비자금의 존재는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 특히나 노 전 대통령은 생전 대법원에서 확정된 2,628억 원의 추징금을 완납하면서 사법적 책임을 벗었다.
SK 쪽에 책임을 묻기도 어렵다. 범죄수익은닉 관련 법은 사건 이후인 2001년에 만들어졌다. 이번 이혼 소송의 항소심 재판부가 "최소한 1991년 당시를 기준으로 보면 최 전 회장이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금전 지원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위법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한 이유다. 한 부장판사 출신 변호사는 "공소시효는 물론 소급적용 문제도 있어 혐의 적용이 불가하다"고 설명했다.
특별법 제정을 대책으로 내놓는 주장도 있지만, 역시 회의적 시각이 지배적이다. 검사 출신 김국일 변호사(법무법인 대륜)는 "특별법을 만든다고 해도 형사처벌은 '사람'에 전속되는 것이 원칙이라 당사자들이 사망한 이상 어렵다"며 위헌적 소지를 언급했다.
다만 법률적으로 책임을 묻기 어렵지만, 여론의 눈으로 볼 땐 '성공한 정경유착'이 '성공한 비자금 은닉'으로 이어지고 말았다는 자조적 평가를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노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는 친인척이나 지인에게 뭉칫돈을 맡긴 뒤 그 액수를 따로 기록(김옥숙 메모)해 뒀는데, 이 김옥숙 메모 중에서 끝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사돈(선경)에게 제공한 300억 원이 유일했다. 노 전 대통령 부부가 수천억 원을 추징당하면서도 딸을 위해 입을 다물었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정황이다. 한 수도권의 부장판사는 이를 두고 "30년간 양가에서 그 존재를 꽁꽁 숨긴 덕에 딸에게 수혜가 돌아간 셈"이라고 꼬집었다.
최다원 기자 da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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