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과 두 번의 연애 실패, 제 상처를 보듬어줄 사람 만날 수 있을까요 [정우열의 회복]
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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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성적 성격의 30대 남성 회사원입니다. 저는 학창 시절 학교폭력(학폭)을 당했습니다. 초∙중∙고교 12년 동안이나요. 지방에서 나고 자랐는데 지역이 좁아 초등학교 6년을 함께 보낸 아이들이 고등학교까지 같이 다니다 보니 10대 때는 맞는 게 일상이었습니다. 선생님께 말하지 못하고 늘 참고 지냈어요. 부모님과의 관계는 좋았습니다. 중학생 땐 교실까지 찾아오셔서 아이들에게 저를 그만 괴롭히라고 호소하실 정도로 저를 걱정하셨어요.
학폭에 시달리느라 친구 한 명 사귀지도 못했고 이성을 만나는 것도 어려웠습니다. 한 여학생과 연락하고 지낸 적이 있는데, 아이들은 그 애까지 괴롭히더군요. 학폭 피해자란 게 알려지는 게 싫어서 그 여학생에게 연락이 와도 피했더니 조금씩 멀어졌고 결국 관계가 끊겼습니다. 그 일이 큰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대학과 군대에선 다행히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예비군 훈련에서 저의 과거를 아는 동창을 만난 뒤로는 고향을 떠나서 서울에 있는 회사에 취직했습니다. 취업한 지 6개월쯤 됐을 때 회사와 집만 오가는 생활이 싫어서 용기를 내서 한 모임에 가입했습니다. 저를 환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마음이 맞는 연상의 여성을 몰래 좋아하게 됐습니다. 조금씩 가까워져 연락을 하고 지냈는데, 모임에 소문이 퍼지면서 ‘미풍양속을 해쳤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제명을 당했습니다. 이후 그분은 제 연락을 피하더군요. 그때 일은 인생에서 가장 큰 마음의 상처로 남았습니다.
그 뒤론 사람을 믿지 않게 됐어요. 감정 표현도 점점 더 하지 않게 됐죠. 예전엔 '성격이 음침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는데, 요즘은 ‘차갑다’ ‘냉소적이다’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누구에게든 사랑받는 여동생과 달리 언제나 미움받고 살아왔기에 삶에 큰 미련이 없습니다. 누군가와 함께하면서 괴로운 것보다는 혼자 있는 게 편하다는 생각에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향합니다. 사람이 많고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싫어서 새벽에 일찍 출근했다가 외근을 하고 일부러 저녁 늦게 퇴근합니다. 특히 남자들 무리를 보면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피합니다.
저는 더 이상 새로운 사람을 만나 친구관계를 맺는 데 관심이 없습니다. 연애도 단념했어요. 집에선 늘 혼자 소주 두 병을 마시면서 아픈 기억을 잊으려 합니다. 제게 남은 꿈이 있다면 혼자 할 수 있는 일을 직업으로 갖는 것입니다. 취미이자 특기가 운전이어서 대형 면허 취득과 굴삭기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런 저의 상처를 끌어안아 주는 사람을 만나면 좋겠지만, 단념해야겠죠. 지금처럼 계속 혼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사는 게 과연 정상일까요.
성시윤(가명∙32∙회사원)
시윤씨가 학창 시절 내내 겪었을 고통과 지금까지 이어진 상처가 얼마나 클지를 헤아리며 가슴이 아팠습니다. 시윤씨가 느끼는 감정 중엔 무력감이 가장 큰 듯합니다. 학창 시절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고 어떻게 해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컸을 거예요. 운전을 좋아하는 건 그와 관련이 있을 겁니다. 스스로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느낌을 받을 때 운전대를 잡고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려는 심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운전은 집에 틀어박혀 지내는 회피와 달리 타인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세상을 돌아다니며 모험하는 활동이죠. 차가 가림막 같은 보호장치 역할을 하기에 때론 운전을 통해 공격성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고요.
시윤씨가 운전을 좋아하는 건 사람들과 어울리고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그에 대한 욕구가 여전히 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연애를 단념했다고 하지만 상처를 끌어안아줄 사람을 여전히 만나고 싶어 하는 것처럼요. 감정을 표현하려는 욕구도 있는 듯합니다. 대개 표현 자체에 대한 욕구가 없는 사람은 음침하다는 말을 듣지 않거든요. 대놓고 표현하기 두려워 조심하지만 은연 중에 시윤씨가 티를 냈을 수 있습니다.
시윤씨는 운이 나빠서 학창 시절에 폭력적 환경에 처했지만 타인과 좋은 관계를 이어갈 수 있는 능력이 충분히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대학과 군대에서 마음에 맞는 사람들을 만났고 직장생활 중에 용기를 내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잖아요.
부모님과의 관계가 좋았다고 했지만 정서적 소통이 긴밀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부모님이 시윤씨를 잘 보호해줬다면 학창 시절 내내 학폭이 계속되진 않았을 테니까요. 부모님이 학교와 상의하거나 절차를 밟는 대신 직접 교실로 찾아가는 건 바람직한 행동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녀가 보복을 당하거나 놀림감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은 시윤씨와 미리 소통하며 신중하게 접근하셨어야 했어요. 그런 부모님의 대처에 대해 아쉬움, 실망, 원망의 감정을 품었을 수 있습니다.
여동생과 자신을 비교하는 심리에도 부모님의 영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시윤씨와 동생을 다르게 대하는 부모님의 반응이 누적되면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 있어요. 부모님에 대한 시윤씨의 진솔한 감정을 잘 살펴보세요. 그 안에 외면이나 억압이 있다면 그것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트라우마를 겪은 후 가족, 친구 등 내 편이 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충분한 지지를 받는 것은 중요합니다. 트라우마 극복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가족 관계 안에서 처리하지 못한 복잡한 감정들이 있었는지 꼭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시윤씨에겐 이성 관계가 두 번 틀어진 것이 큰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연애는 인정 욕구, 의존 욕구, 안전감, 소속감, 신뢰감 등이 모두 충족되는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경험이죠. 그런데 시윤씨에겐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학창 시절 따돌림이나 학폭을 경험한 사람은 애정과 인정 욕구가 과도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트라우마로 인한 인간관계의 문제를 이상적인 연애로 해결하려는 성향이 있어요. 관계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상대에게 집착하는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시윤씨 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트라우마 후유증을 조심스럽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연애 감정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상대가 불편하게 느꼈을지 모르는 행동을 하지 않았는지 살펴볼 필요도 있습니다.
연애는 안정적인 심리 상태에서 만나야 서로 독립적인 부분을 존중해주면서 적당한 수준에서 의존하는 관계를 형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윤씨는 마음속 상처를 연애 한 번으로 극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수 있어요. 나를 이해하고 상처를 보듬어주는 사람을 만나 문제가 단번에 해결되는 이상적인 상황을 상상할 수 있죠. 하지만 그런 기대를 할수록 더 좌절하고 상처받는 악순환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학폭 트라우마로 인한 심리적 증상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시윤씨가 어떤 폭력이나 따돌림을 당했는지, 그로 인해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부모님에 대한 감정은 어땠는지부터 잘 헤아려 보세요.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은 타인에게 벽을 치고 스스로의 마음도 살피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기 감정이 잘 인식되지 않고 자신감도 없어지죠. ‘내가 정상인지 모르겠다’는 시윤씨의 고민에서 그게 드러납니다.
사람을 피하려는 시윤씨 마음은 이해되지만, 힘들더라도 계속 마주해야 합니다. 자칫하면 관계에 지나친 힘이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유의하면서 가급적 가벼운 마음으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세요. 여러 사람들과 긴밀하게 어울리지 않아도 함께하는 일을 해보는 도전을 하면서 조금씩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성 관계 문제도 시윤씨 상처를 감싸줄 이상적인 사람을 찾기보단 회피하지 않고 관계를 맺어간다는 마음으로 힘을 빼고 수위와 속도를 조절하며 도전해보는 건 어떨까요. 내 속도가 아니라 상대의 속도에 맞추도록 배려하면서 말이죠.
기회가 된다면 나를 수용하는 환경에서 감정을 들여다보고 도전할 수 있게 격려해주는 개인 상담을 받는 것도 좋습니다. 혼자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건 무척 힘든 일이니까요. 시윤씨가 자기 감정을 돌아보고 내 편이 돼 줄 수 있는 누군가에게 격려를 받으면서 세상과의 벽을 허물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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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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