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훈의 고전 속 이 문장] <376> 느릿한 일상의 행복을 읊은 문사 오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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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먹은 후 천천히 채마밭으로 걸으니(食後徐行向菜田·식후서행향채전)/ 병든 처가 뒤따르고 어린아이는 앞에 서네.
/ 인생의 이 즐거움 더 바랄 바 없으니(人生此樂餘無願·인생차락여무원)/ 누가 스스로 백 년 인생 고생하며 보내겠는가.
밥 먹고 나서 아내와 아이들 데리고 산책을 나가니 세상에 더 부러울 게 없었다.
그리하여 셋째 구에서 "인생의 이 즐거움 더 바랄 바 없으니"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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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誰自勞勞送百年·수자로로송백년
밥 먹은 후 천천히 채마밭으로 걸으니(食後徐行向菜田·식후서행향채전)/ 병든 처가 뒤따르고 어린아이는 앞에 서네.(病妻隨後稚兒先·병처수후치아선)/ 인생의 이 즐거움 더 바랄 바 없으니(人生此樂餘無願·인생차락여무원)/ 누가 스스로 백 년 인생 고생하며 보내겠는가.(誰自勞勞送百年·수자로로송백년)
위 시는 오숙(吳䎘·1592~1634)의 ‘밥 먹은 후’(食後·식후)로, 그의 문집인 ‘천파집(天坡集)’ 권1에 있다. 도시에 사는 사람이든, 시골에 사는 사람이든 위 시를 읽으면 시의 이미지가 머릿속에 금방 그려질 것이다. 밥을 먹고 소화를 시킬 겸 산책하러 간다. 요즘은 대개 남녀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나란히 걷지만, 예전에는 남자가 앞서고 여자가 그 뒤를 따랐다. 물론 대화도 없었다. 아이는 예외였다. 부모님과 함께 산책을 나가니 기분이 좋아 먼저 뛰어간다.
아내는 병이 들었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여자는 출산 과정에서, 또 산후조리가 잘못돼 일찍 죽는 경우가 많았다. 또 폐병이나 영양실조로도 많이 죽었다. 시인의 아내가 언제 죽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시인은 21세인 1612년 문과에 급제해 경상도관찰사·황해도관찰사 등 여러 벼슬을 지냈다. 1634년 명나라 사신 황손무(黃孫武)를 맞이하는 접반사로 평안북도 철산군 백량면 황해상에 위치한 섬인 가도(椵島)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세상을 떴다.
위 시는 시인이 세상을 버린 43세 이전에 지어졌다. 밥 먹고 나서 아내와 아이들 데리고 산책을 나가니 세상에 더 부러울 게 없었다. 그리하여 셋째 구에서 “인생의 이 즐거움 더 바랄 바 없으니”라고 했다. 마지막 구는 보기에 따라 수긍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먹고사는 데 걱정 없을 터였으니 배부른 소리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관리는 정부 일을 하고 녹봉을 받았으니 그리 탓할 것만 못 된다.
가난하게 산 사람의 글이나 천민이 쓴 글도 자주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그런데 당시는 글을 하는 사람이 한정돼 있었다. 시나 문장을 짓는 이는 주로 양반 계층이었다. 필자는 가능하면 독자들에게 다양한 사람의 글을 소개하려고 고민을 많이 한다. 이런 상황을 이해해 주시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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