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명배우들은 왜 ‘무덤파기’를 탐내나
‘햄릿’에서 진실을 말하는 배역
부귀도 영화도 권력도 덧없다
늦기 전에 잘못을 바로잡아라
2022년 국립극장에서 연극 ‘햄릿’을 공연할 때 벌어진 일이다. 출연진은 권성덕, 전무송, 박정자, 손숙, 정동환, 김성녀, 유인촌, 윤석화, 손봉숙, 길해연 등 이해랑연극상 수상자만 10명이었다. 예상대로 배역 경쟁이 치열했다. 그런데 기라성 같은 배우들이 탐낸 배역은 주인공 햄릿이나 오필리어, 클로디어스나 거트루드가 아니었다.
“무덤파기 역을 강력히 희망했다”(박정자) “나도 무덤파기를 맡고 싶었다”(정동환) “무덤파기 역을 원했는데 빼앗겼다”(유인촌)... 무대에 짧게 등장하고 대사도 적은 ‘무덤파기’에 무슨 꿀단지라도 숨어 있는 것일까. 기자회견장에 지팡이를 짚고 느릿느릿 나타난 권성덕이 농담을 던졌다. “그토록 바라는 줄 알았다면 무덤파기를 내놓고 내가 햄릿을 할 걸 그랬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400년도 더 된 작품이다. 덴마크 왕자 햄릿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곧장 숙부(클로디어스)와 재혼한 어머니(거트루드)를 원망하며 바닥 모를 슬픔에 빠져 있다. 장례식장에 올린 고기를 식기도 전에 결혼식장으로 옮긴 셈이라며 비통해한다. 선왕의 망령은 “클로디어스가 나를 독살했다”고 폭로한다. 그러나 햄릿은 복수를 망설인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독백 “사느냐 죽느냐~”는 그 대목에서 흘러나온다.
명배우들이 무덤파기를 탐낸다는 사실을 알고 나자 이 연극이 새롭게 보였다. 수십 년 동안 무덤을 파고 시신을 매장하는 일만 해온 무덤파기의 입을 빌려 셰익스피어가 들려준 통찰은 무엇일까. 묘지 장면에서 햄릿이 묻고 무덤파기가 답한다. “그 해골은 누구였소?” “선왕의 어릿광대입지요.” (해골을 집어 들고) “이게 요릭이라고?” “확실합니다!”
불완전하고 어리석고 나약한 인간들이 득시글대는 ‘햄릿’에서 가장 확신에 차 있는 인물은 무덤파기다. 오직 무덤파기만이 확고부동한 진실을 삽으로 퍼내듯 아무렇지도 않게 들려준다. 해골을 든 채 햄릿은 중얼거린다. “살아서 제아무리 고결하면 무엇 하나.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도, 천하를 떨게 하던 시저 황제도 흙 속에선 이런 몰골이겠군.”
사람은 누구나 한 번 태어나고 한 번 죽는다. 무덤파기는 우리가 알면서도 회피하는 진실, 눈을 돌리고 귀를 막는 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부귀도 영화도 권력도 이념도 덧없다. 모두 언젠가 해골이 되고 먼지가 될지니. 왕이든 거지든 삶에는 끝이 있나니, 죽음만큼 평등한 것도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며 운명의 발길질을 견디던 햄릿은 마침내 행동한다.
오는 9일 이해랑 연극상 수상자 14명이 참여하는 ‘햄릿’(배삼식 극본·손진책 연출)이 대학로에서 개막한다. 혼탁함과 어리석음, 악으로 들어찬 세계가 펼쳐질 것이다. 연극은 문제적 인간들을 다루지만 도덕 교과서가 아니다.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훈계하지 않고 ‘저렇게 살아도 되나?’라고 관객 스스로 반문하게 한다. ‘햄릿’에는 흉악무도한 클로디어스가 “신은 악마를 사랑하신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세상이 이토록 악으로 넘쳐날 리가 없지”라고 기도하는 대목이 있다. 하느님에게 대들듯이 자신이 저지른 죄를 합리화하는 것이다. 잘못한 놈이 더 뻔뻔하게 큰소리치는 혼탁한 세상을 거울처럼 보여준다.
미워하고 파괴하는 것은 쉽다. 건설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어리석고 나약하지만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고통스러워도 용기를 내 ‘햄릿’의 끔찍한 내부를 들여다보라. 사느냐 죽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아직 보지 않은 것이 문제다. “좋았던 시절은 간데없고 두 눈을 떠보니 땅속이로다~”로 흘러가는 무덤파기의 노래를 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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