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想과 세상]저녁 숲의 눈동자
기자 2024. 6. 2. 21:00
하늘보다 먼저 숲이 저문다
숲이 먼저 저물어
어두워오는 하늘을 더 오래 밝게 한다
숲속에 있으면 저녁은
시장한 잎벌레처럼 천창에 숭숭
구멍을 뚫어놓는다
밀생한 잎과 잎 사이에서
모눈종이처럼 빛나는 틈들,
하늘과 숲이 만나 뜨는
저 수만의 눈을 마주하기 위하여
더 깊은 숲속으로 들어간다
저무는 하늘보다 더 깊이 저물어서
공작의 눈처럼 펼쳐지는 밤하늘
내가 어디서 이런 주목을 받았던가
저 숲에 누군가 있다
내 일거수일투족에 반응하는 청설모나 물사슴,
아니 그 누구도 아니라면 어떠리
허공으로 사라진 산딸나무
꽃빛 같은 것이면 어떠리
저물고 저물어 모든 눈들을 마주하는
저녁 숲의 눈동자
손택수(1970~)
시인은 저녁 숲에 들었다. “숲이 먼저 저물”어, “어두워오는 하늘을 더 오래 밝게” 하는 것을 보았다. 숲에서 본 저녁 하늘은 배고픈 “잎벌레”가 “천창에” 구멍을 숭숭 “뚫어놓”은 것 같았다. 빽빽한 잎 사이로 보이는 “빛나는 틈들”은 “모눈종이” 같았다. 밤의 숲에 들면,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눈을 깜박거리고 있는지. 그 눈들과 수많은 별이 만나서 함께 눈을 뜨는 것, 또 “눈을 마주”한다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신비로운 일인지.
“저무는 하늘보다 더 깊이” 저문 후에야 환하게 펼쳐지는 밤하늘을 본다. 잎벌레들의 천창은 커다란 잎사귀, 숲의 천창은 하늘일 것이다. 시인은 숲에 온전히 들어서야 숲이 하늘보다 어둡다는 것을, 어둡기 때문에 더 잘 보이고, 잘 들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늘의 별들과 달이 번갈아 가며, 전구를 갈아끼우는 아득한 밤에.
이설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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