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침은 오늘도 흐른다 [1인칭 책읽기]

이민우 기자 2024. 6. 2. 2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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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우 랩장의 1인칭 책읽기
「한국 불교문학의 기둥을 찾아서」
어떤 일이건 끝이 있지만
인연만큼은 그렇지 않다
이승하 시인의 52번째 책 출간은 단순히 출간만을 의미하지는 않았다.[사진=더스쿠프·리터러시]

어둠 속, 꽃지 해수욕장의 파도가 모래사장으로 올라왔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된 모래는 드론 쇼의 불빛처럼 반짝였다. 18년 전, 꽃지 해수욕장에 문청들이 모였다. 사설 문학캠프에서 시인, 소설가, 그리고 문학 작가를 꿈꾸는 청년들이 함께 만났다. 그곳에 고등학생인 내가 있었다. 그곳에서 이승하 시인을 만났다.

이승하 시인은 새벽 시계에서 건전지를 빼달라고 했다. 시계 소리에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작은 시계의 틱틱 소리에 잠을 못 자는 시인을 보며 나는 촘촘히 직조된 리넨 소재의 옷을 떠올렸다. 그물망처럼 짜인 시인의 어떤 감각이란 저런 것 아닐까. 문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신기한 시기였다.

이승하 시인이 내 글을 보고 무엇이라 이야기했는지 이제는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글로만 만났던 한 시인이 내 이름을 불러주던 날의 두근거림을 나는 기억한다. "민우야, 이 글은……"

지난 5월 22일, 중앙대 법학관 건물 10층의 한 강의실에서 조촐한 북 토크쇼가 열렸다. 이 학교 문예창작학과에서 25년간 재직한 이승하 교수는 이날 52권째 단독 저서인 「한국 불교문학의 기둥을 찾아서」를 펴내 출판기념회를 개최했다.

나는 강의실 가장자리에 쌓여 있는 책을 살펴보고 있었다. 한 사람이 52권의 책을 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문학과 의식」에서 이승하론을 쓴 이숭원 문학평론가는 "그 세대에 그만큼 책을 많이 낸 사람은 없다"고 이야기했다. 나 역시 아는 사람 중 이승하 시인이 가장 많은 책을 낸 사람이었다.

"민우야, 왔구나" 이승하 시인의 부름에 십수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꽃지 해수욕장의 어느 공간을 떠올렸다. 거기에는 째깍째깍 시계 초침 소리가 있었고, 문학을 사랑하던 내가 있었고 문학을 사랑하던 아이들을 보러 온 이승하 시인도 있었다.

「한국 불교문학의 기둥을 찾아서」는 이승하 시인이 한국 시에 나타난 불교사상을 들여다본 책이다. 만해와 오현의 시, 효봉과 경봉의 오도송을 연구했고, 성철에서 도신 스님(박금성)까지, 수많은 문인의 시에 불교사상이 어떻게 녹아 있는지를 다룬다.

불교의 세계관은 순환적이다. 연기법緣起法에 따르면 모든 존재는 서로 의존하고 관계 맺음으로써 존재한다. 이승하 시인과 처음 만난, 17살의 어느 여름에 들었던 목소리가 지금껏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것을 생각해 보면 불교적 세계 인식에 동의하게 된다.

[사진=국학자료원 제공]

이날 북 토크쇼는 「한국 불교문학의 기둥을 찾아서」가 중심이 아니었다. 이승하 시인은 내년 1학기로 정년퇴임을 앞두고 있었다. 52번째 책의 북 토크쇼이자 정년퇴임을 기념하는 행사이기도 했다. 이승하 시인과 실처럼 서로 엮였던 사람들이 시인의 등단부터 지금까지의 시 세계의 변화를 짚었다. 강의실은 이승하 시인과 제자들, 그리고 인연이 있는 이들로 가득 찼다.

이승하 시인의 데뷔는 '화가 뭉크와 함께'라는 시였다. 그는 말 더듬듯 세계의 폭력을 폭로했다. 그래서 그럴까. 이승하 시인은 수십년 동안 정신병원과 노인병원에 정기적으로 면회를 다니면서 인간의 몸과 영혼의 고통을 시적으로 탐구했다. 십수년 동안 교도소와 구치소, 소년원과 군부대에 특강을 다니면서 벽체 속에 수용된 자를 만났다. 그것이 그의 문학이 됐다.

지난 40년 동안 간행한 단독 저서로 시집 16권, 시선집 2권, 소설집 1권, 문학평론집 16권, 산문집과 평전 13권, 시 창작론 4권을 모두 합치면 52권이다. 사실 이 많은 책은 이승하 시인이 한올 한올 모아온 인연들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국 불교문학의 기둥을 찾아서」의 출간기념회는 불교식 순환처럼 느껴진다. 수많은 인연이 만나고 그것을 기록하고 다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 어쩌면 이승하 시인은 시간이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20년 전 어느 해변에서 시계의 건전지를 빼달라고 한 것 아닐까.

시계 침은 오늘도 째깍째깍 움직인다. 20여 년의 시간은 직진이 아니라 일종의 뫼비우스의 띠처럼 우리의 삶을 돌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승하 시인과 그를 둘러싼 수많은 인연, 그리고 나까지 모두가 그곳에 있다.

이민우 더스쿠프 기자
lmw@thescoop.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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