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철의 중국萬窓] 우국지사의 고향 호남… 詩聖 두보, 시로 역사를 쓰다
중국 남부에 자리잡은 호남성(후난성·湖南省)은 베이징에서 1200km, 상하이에서 1000km 떨어져 있다. 호남이라는 이름은 역대 문인들이 즐겨 읊었던 동정호(둥팅호·洞庭湖) 남쪽이라는 데에서 유래했다. '800리 동정'으로 불리는 동정호는 호남과 호북(후베이·湖北)성을 나누는 거대한 호수로, 서울 면적의 거의 네배에 달한다. 호남성의 성도인 장사(창사·長沙)는 혁명의 DNA가 흐르는 호남의 상징으로, 마오쩌둥의 공산주의 혁명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장사의 남북으로 상강(湘江)이 흐르는데 장사라는 이름은 상강 한가운데 있는 모래톱(사주·沙洲)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중국 도시에는 별명이 많은데 장사는 '별의 도시'(성성·星城)로 불린다.
호남은 우국지사의 고향이기도 하다. 우국충정의 심정을 담은 '초사'(楚辭)와 '어부사'(漁父辭)로 유명한 굴원(屈原), 사마천이 '사기'(史記)에서 칭송한 한나라 문인 가의(賈誼)가 바로 이곳 태생이다. 중국 고대 문학은 황하 유역을 중심으로 한 북방 문학과, 장강(양쯔강)을 중심으로 한 남방 문학으로 나눌 수 있다. 북방 문학의 대표적 시가가 4언을 위주로 하는 '시경'(詩經)이라면, 남방 문학의 대표작이 3언 중심의 '초사'다. '이소'(離騷) '구가'(九歌) 등 20여편이 실려있는 초사는 전국시대 조국 초나라에 대한 충정과 부패한 현실에 대한 비판, 이상의 추구 등을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있다.
'어부사'(어부의 노래)는 세상의 부패와 부정에 울분을 토하는 굴원에 대해 어부가 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어부가 굴원에게 왜 추방을 당했느냐고 물으니 굴원은 세상이 온통 다 흐렸는데 나 혼자만 맑고, 뭇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있는 이유로 추방을 당했다고 대답한다. 이를 들은 어부는 "성인은 사물에 얽매이거나 걸리지 않고, 세상의 추이와 함께 변해간다. 세상이 흐리면 어찌하여 흙탕물을 휘저어 그 물결을 날리지 않으며, 뭇 사람이 다 취해 있으면 어찌하여 그 찌꺼기를 먹고 술을 마시지 않았는가"라면서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지수청혜, 가이탁오영·창랑의 물이 맑거든 나의 갓끈을 씻고)
滄浪之水濯兮, 可以濯吾足 (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창랑의 물이 흐리거든 발을 씻으면 되리)
라며 노를 두드리고 떠난다. 어부사는 고려와 조선시대 지식인들도 사랑했던 소식(蘇軾·소동파)의 '적벽부'(赤壁賦)에 나타난 초연, 달관의 사상과도 이어진다.
장사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시인이 두보(杜甫)로, 두보가 지은 '강남봉이구년'(江南逢李龜年)의 무대이기도 하다. 중국에서 시의 신으로 추앙되는 시인이 세 사람 있는데 두보는 시성(詩聖), 이백과 왕유는 각각 시선(詩仙), 시불(詩佛)로 불린다. 시 속에 담긴 사상으로 보자면 두보는 유교, 이백은 도교, 왕유는 불교와 맞닿아있다. 특히 이백과 두보는 '이·두'로 불릴 정도로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힌다. 이백의 시는 상상력이 풍부하고 자유분방하며, 세속을 벗어난 신선의 기개를 갖고 있다. 반면 두보의 시풍은 '침울하고 풀이 꺽인 듯' 하면서도 엄숙하고 장중하다. 당나라 안·사(안록산·사사명)의 난때 어지러운 사회현실과 개인의 고통스런 처지를 노래한 까닭에 두보의 시는 '시로 쓴 역사'라고도 부른다.
'강남봉이구년'은 두보가 말년에 유랑 생활을 하던 중 강남에서 태평시절 도읍인 장안(長安)에서 자주 만났던 명창 이구년을 다시 만나 지은 시로, 인생의 무상함을 잘 표현하고 있다.
江南逢李龜年(강남봉이구년·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다)
岐王宅裏尋常見 (기왕택리심상견·기왕의 집 안에서 늘 보았더니)
崔九堂前幾度聞 (최구당전기도문·최구의 집 앞에서 이구년의 노래를 몇 번 들었던가)
正時江南好風景 (정시강남호풍경· 참으로 강남의 풍경이 좋으니)
洛花時節又逢君 (낙화시절우봉군 ·꽃 지는 시절에 또 당신을 만나 보는구나)
이 시는 화려한 시절을 다 지나보내고 유락한 신세가 된 것을 지는 꽃에 비유했다. 평생을 곤궁하게 떠도는 삶을 산 두보의 시에는 사람살이의 애환과 쓸쓸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배어 있다. 하지만 단순히 감상(感傷)으로 끝나지 않고, 공감을 자아내는 울림이 있다.
후난의 이름이 동정호에서 연유했다고 했는데 둥팅호와 관련된 두보의 또다른 유명한 시가 '등악양루'(登岳陽樓)다. 동정호에는 강남 3대 명루(名樓)로 불리는 이름난 누각이 있다. 악양의 악양루岳陽樓)와 무한(武漢)의 황학루(黃鶴樓), 남창(南昌)의 등왕각(등王閣)이 그곳이다. 여기에 산서성(산시성)의 관작루(관雀樓)를 더해 중국의 4대 누각으로 부르기도 한다.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호남과 호북을 떠돌던 두보는 광활한 동정호의 악양루에 올라 절세의 시를 남겼다.
登岳陽樓(등악양루·악양루에 올라)
昔聞洞庭水 (석문동정수·예부터 동정호를 들었더니)
今上岳陽樓 (금상악양루·이제야 악양루에 오르네)
吳楚東南坼 (오초동남탁·오나라, 초나라가 동쪽과 남쪽으로 터져있고)
乾坤日夜浮 (건곤일야부·해와 달은 밤낮으로 호수에 떠 있도다)
親朋無一字 (친붕무일자·친지와 벗에게선 소식 한자 없고)
老病有孤舟 (노병유고주·늙고 병든 몸만 외로운 배 안에 있네)
戎馬關山北 (융마관산북·고향 관산 북쪽은 여전히 전쟁 소식)
憑軒涕泗流 (빙헌체사류·누각 난간에 기대어 눈물 흘릴 뿐)
고향에 가고 싶으나 전쟁으로 인해 희망이 없는 시인이 바다처럼 망망한 동정호를 보고 악양루 난간에 기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얼마전 서울에서 한일중 정상회의가 열릴 때 윤석열 대통령이 한중 회담을 가진 뒤 리창 총리를 배웅하면서 언급한 '춘야희우'(春夜喜雨)도 두보의 작품이다. 비교적 한가롭고 밝은 색의 시이지만, 역시 인생의 우수(憂愁)를 머금고 있다. 정우성과 중국 배우 가오위엔위엔(고원원)이 주연한 영화 '호우시절'의 제목은 '춘야희우'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春夜喜雨(춘야희우·봄밤의 기쁜 비)
好雨知時節 (호우지시절·좋은 비 시절을 알아)
當春乃發生 (당춘내발생·봄을 맞아 만물을 소생하게 하네)
隨風潛入夜 (수풍잠입야·바람 따라 살며시 밤에 내리니)
潤物細無聲 (윤물세무성·만물을 적시지만 가늘어 소리조차 없도다)
野徑雲俱黑 (야경운구흑·들길은 구름으로 어둑하고)
江船火獨明 (강선화독명·강 위 고기잡이배 불빛만 밝네)
曉看紅濕處 (효간홍습처·새벽녘 비에 젖은 붉은 땅을 보니)
花重錦官城 (화중금관성·금관성의 꽃들도 만발했으리라)
금관성은 사천(스촨·四川)성 성도(成都·청두)에 있는 성으로, 두보는 이곳 남쪽 교외 계곡에 서당을 짓고 약 4년동안 비교적 평화롭게 지냈다. 중국의 시와 그림에는 '시중유화'(詩中有畵)라고 해서 자연의 풍광에 시인의 정서를 담아내는 '정경융합'(情景融合)의 전통이 있다.
'춘망(春望)'의 '국파산하재 성춘초목심'(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그대로니, 성에 봄 들어 초목이 깊어라)와 '등고'(登高)의
萬里悲秋常作客 (만리비추상작객·만리밖 슬픈 가을에 나그네 되어)
百年多病獨登臺 (백년다병독등대·병 많은 인생 백년 홀로 대에 올라)
艱難苦恨繁霜鬚 (간난고한번상빈·온갖 고통에 서리 같은 귀밑머리가 많음이 서글프니)
燎倒新停濁酒杯 (요도신정탁주배·늙고 초췌함이 흐린 술잔을 새로 멈추었노라)
도 두보 시의 유명한 구절이다.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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