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가 [서울 말고]
이고운 | 부산 엠비시 피디
어린 시절, 부모님이 집을 비울 때면 까치발을 들고 부모님의 책장을 구경했다. 한자가 많아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책, 사진이 많아 읽기 좋은 잡지, 손때 묻은 소설책을 뒤적이다 보면 가끔 부모님이 선물 받은 것 같은 낡은 책들도 만났다. 그런 책의 첫 장엔 꼭 어른스러운 글씨로 새겨진 짧은 문장이 있었다. 나의 소중한 친구에게, 천구백팔십몇년 모월 모일. 그런 글씨를 볼 때면 내가 모르는 시절의 부모님에게 누군가 건넸을 어떤 단정한 마음에 대해 상상했다.
쑥스럽지만 손글씨가 새겨진 책이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선물 같다고 믿던 시절도 있었다. 그 무렵 누구에게, 어떤 책에, 무슨 글을 써서 선물했는지는 아득한데 다정한 사람들이 건네준 책들은 여전히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이를테면 동경하던 언니가 연필로 쓴 쪽지가 붙어 있는 책. 시원시원한 필체로 써진, ‘네 끝이 궁금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그 쪽지를 요즘도 가끔 찾아 읽는다. 그러면 아무리 구겨진 날에도, 내일은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용기가 생긴다.
얼마 전 익명의 사람들이 쓴 글씨로 가득한 책을 하나 발견했다. 언젠가 반드시 가겠다고 벼르던 전포동(부산)의 한 카페에서였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그곳은 보통 카페와 달리 일인실로만 구성되어 있어, 책을 읽거나 생각을 정리하기에 안성맞춤인 장소 같았다. 예약한 공간에 들어서니 책 읽기 좋은 일인용 소파와 탁자,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이 보였다. 책은 탁자 위에 올려져 있었다. ‘공용 일기장’이라고 써진 흰색 노트였지만, 어쩐지 책 같은 모양새였다. 페이지마다 사람들이 저마다의 필체로 남긴 글들이 빼곡했다.
누군가는 한 페이지에 귀여운 꽃을 든 행운 요정을 그려두었다. 행운 요정은 ‘행운을 드려요’라는 말풍선을 달고 있었다. 책을 읽다가 발견한 좋은 구절, 즐겨 듣는 노래 가사를 쓴 사람도 있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둔 중3은 ‘어쩌다 이만큼이나 살았지?’라는 고뇌를 썼고, 서울 집에 두고 온 귀여운 아이들과 남편의 캐릭터를 그린 엄마는 부산 여행에서 느낀 해방감에 대해 고백했다.
연인과의 이별을 예감하거나 이미 끝난 사랑에 관해 쓴 사람들이 있었고, 이제 막 시작하는 사랑에 대한 설렘과 터질 것 같은 마음을 고백하는 이들도 있었다. 누군가는 헤어진 연인의 이름 앞으로 편지를 쓰기도 했는데, 편지 곳곳엔 ‘네가 이걸 볼 일은 없겠지만’이라는 표현이 꼭 우는 것처럼 흐리고 긴 필체로 남겨져 있었다. 누군가에겐 결코 닿을 수 없고, 어쩌다 낯선 이와 만나버린 마음들이 군데군데 펼쳐져 있었다.
손바닥만한 스마트폰 화면에 갇혀 있는 시간이 긴 요즘엔, 꼭 세상을 채우는 게 온라인 뉴스에 달린 거칠고 폭력적인 댓글이나 새로고침 한 번에 휘발되면 그만인 말들뿐인 것만 같다. 거기에 묻어나는 혐오와 배타, 이기심과 오만을 마주할 때면 문득 세상이 무서워지기도 한다.
반드시 완독하겠다고 결심한 책은 제쳐놓고, 낯선 카페에서 이름도 모르는 타인들이 한 장씩 채워나간 책을 읽는 동안 생각했다. 가끔 세상이 무섭고 싫어질 때면 전포동 골목의 어느 조용한 카페 탁자 위에 놓인 이 책을 떠올리자고. 장마다 남겨진 개성 있는 손글씨들과 귀여운 행운 요정과 거기에 담긴 마음을 생각할 것이다. 쉽게 보이진 않지만, 분명 어디에나 존재하는 곱고 여리고 따뜻하고 슬픈 마음들. 어느 집 책장과 서랍에, 낡은 헌책방과 일기장에, 누군가의 가슴과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을 그런 마음들에 대해 생각하면 무서운 마음이 조금은 옅어질지도 모른다. 조금 더 용기를 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세상을 가득 채운 것 같은 비난과 조롱과 공격들 틈에서 사랑과 위로를 담은 글을 전할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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