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수향의 추억과 음식의 기억 [양희은의 어떤 날]
양희은 | 가수
언어불통인 곳을 여행하려면 단체관광이 좋다. 모처럼 중국 강남수향행을 정하고 서당, 오진, 주장, 소주까지 돌아봤다. 7세기 수나라 양제는 북경서 항주에 이르는 1794㎞의 경항대운하를 건설했는데 참 대단한 물류 이동길을 튼 셈이다. 서당에서는 더딘 개발 덕에 이곳을 지켜온 이들의 일상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1㎞ 길이의 상점가 바깥으로 기와지붕이 있어 날씨가 어떻든 산책하기 좋은 연우장랑으로 유명한데, ‘미션 임파서블3’에서 톰 크루즈가 연우장랑을 뛰는 장면으로 관광객들이 더 많이 찾게 되었단다. 한사람 겨우 지날만한 좁은 골목을 ‘롱’이라 하는데, 그렇게나 좁은 골목은 부산에서 지나가보고 처음이라 재밌었다.
오진은 수향마을 중 가장 오래된 곳이며 중국인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곳 10위 안에 들어있다. 수로변 오랜 건물들이 검고 어두워 ‘까마귀 오’자를 써서 ‘오진’으로 불린다는데 무거운 느낌이다. 하지만 옛 모습을 제대로 지키는 곳이기도 하다. 삼백주 양조장, 중국인이 존경하는 현대문학가 마오둔의 집, 천연염색을 하는 염방의 펄럭이는 쪽빛 천들이 바람에 휘날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나는 수향마을 중 주장이 가장 좋았다. “중국 산천의 아름다움은 황산에 모여 있고, 수향의 아름다움은 주장에 모여 있다.” “중국에서는 강남이 천하제일이고, 강남은 수향도시가 천하제일이며, 그 중에 천하제일은 주장이다”는 말처럼 손 꼽히는 곳이다. 큰 부자들이 지은 대저택 중 심만삼의 심청, 명나라 시절 장씨 가문의 장청, 한때 마을 전체를 가졌던 주씨 가문의 장원이란 뜻으로 주장이라 했단다. 100여채 넘는 명청시대 집들과 24개의 돌다리가 그대로 물길을 지키는 곳….
우리나라 사람들과 중국인의 차이는 무엇일까? 우리는 의식주 순서로 말하지만 중국사람은 식의주라고 한다. 옷을 잘 차려입으면 남의 눈은 즐거울지 모르지만 내 뱃속은 허전하다. 반면 내 배가 든든하면 까이꺼 남의 눈에 행색이 허름한들 무슨 상관이냐? 하지만 요사이 중국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차림새는 달라졌다. 한류 영향일까? 입성이 화사하다.
수향마을의 물줄기는 소주로 모이니까 다른 곳과는 크기부터 다르다. 경항대운하의 시작점이자 물류의 집산지답게 대도시로 커왔다. 한족들의 꿈의 도시면서 인재와 장인이 몰리는 예향이고, 부와 문화는 아직까지도 큰 정원으로 남겨져 있다. 중국인들이 가장 살고 싶어하는 도시! 정원을 이루는 나무, 물, 돌 중에서 물을 중시하는 졸정원과 돌 중심인 사자림 그 두곳을 다 가보았다. 돌은 거대한 태호에서 가져온 석회암(태호석)이 부의 상징이었고 그 돌을 여기저기 쌓아 언덕과 굴을 만들었는데, 나는 그곳에 앉아 우리나라 고궁 정원의 여백을 생각하며 중국식 아름다움이 다가오질 않았다. 너무 잔뜩 쌓여있으니 질린달까? 체했달까? 그랬다. 빈자리의 아름다움, 그게 중요하겠다.
전각과 정자 사이를 건너는 돌다리도 직선이 아니고 대여섯번 꺾였는데 이유인즉 귀신(강시)은 직진만 하니까 귀신의 접근을 막기 위해 각도를 여러번 꺾어 다리를 놓았단다. 조용하고 여유로운 평강로와 달리 배에서 내리면 산탕가로 이어지는데 사람들에 치여 걸을 수가 없었다. 숱한 인파 중에 외국인은 없고 주로 내국인이었다. 양쪽 길로는 뻔한 선물가게, 찻집, 먹거리가게가 줄지어있어 그 밥에 그 나물로 별다를 것 없었지만, 아이스크림은 55위안(1만450원)에 사먹으면서 경극 구경하는 가게가 별나보였다. 경극 무대 앞에 서서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핥아먹으며 몰려서있던 사람들이 내눈에는 재미있었다.
서당으로 들어가 먹던 첫 식사 때 땀 흘리던 주방 아주머니가 접시를 들고 들어오면서 어찌나 거침없는 고음으로 얘길하는지 놀랐는데, 그 에너지가 좋다는 공통된 의견이었다. 기운 없는 것보다야 쩡쩡한 게 낫다는 생각들!
귀국길 공항에 도착해서 이번 여행의 어떤 점이 좋았냐고 물으니 배를 원없이 타본 게 좋았다고 했다. 얘기도 통하고 많이 웃고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그게 좋았다. 급히 후딱후딱 지나치지 않고 연령대가 비슷해서인지 천천히 여유가 있어서 좋았다고들 했다. 나는 돼지, 소, 닭, 오리 등이야 그렇다 쳐도 다양한 채소요리가 좋았고 인공감미료나 화학조미료를 안써서 고마웠다. 한끼에 18~20접시씩 나오는 원탁에 열 사람이 앉아서 나누었는데 짭짤한 짠지나 채소반찬이 너무 맛있었다. 잘 먹었어도 배가 무지륵하지 않고 가벼웠다. 중국말만 잘했다면 거기 사람들에게 직접 묻고 싶었다. 이 음식엔 무슨 추억이 있나요? 솔직히 당분간은 중식 사절이지만 강남수향의 추억 어린 나무와 물, 음식의 기억은 오래갈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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