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전쟁’서 빨갱이로 죽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보라”
2002년 8월31일 태풍 루사가 휩쓸고 간 직후 경남 창원시(옛 마산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여양리 여양저수지 부근 고추밭이 파헤쳐지면서 땅속에서 유골 수십구가 튀어나왔다. 예전에 숯을 굽는 숯가마가 있던 곳이라서 숯골로 불리는 골짜기에 있는 외딴 밭이었다. 마산시는 현장에 ‘토사 유출로 인해 무연고 유골이 다량 발견된 지점’이라는 안내판을 세우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마을 토박이 노인들로부터 “6·25전쟁 때 경찰에게 총 맞아 죽은 사람들의 유골”이라는 증언이 나오기 시작했다. “총 든 경찰에게 끌려가서 시체 구덩이를 흙으로 덮는 일을 했다”며 50여년 동안 가슴에 묻어둔 말을 털어놓는 노인도 있었다. 조사 결과, 6·25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0년 7월 경찰에게 학살당한 국민보도연맹원들의 유골이라는 사실이 2004년 4월 밝혀졌다.
마산시는 2004년 4월25일부터 발굴 작업을 시작해 이 일대 6곳에서 200여명의 유골을 수습했다. 하지만 8~9명씩 묶인 상태로 뒤엉켜 있어서, 유골을 한명 한명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두개골은 총에 맞아서 대부분 깨진 상태였다. 태극기가 새겨진 허리띠 버클, 신발, 반지, 깨진 안경, 도장 등 유품과 함께 총알·탄피 등도 수북하게 발굴됐다.
2002년 창원서 유골 발굴 취재하다
6·25때 민간인 학살사건 알고 충격
“명색이 기자가 ‘보도연맹’ 모르다니”
부끄러움은 분노로…20년째 조사중
10년간 ‘레드 툼’ 등 다큐 3편 개봉
네번째 ‘장흥1950’ 9월 목표로 제작
“이걸 끝으로 벗어나고 싶은데 과연…”
“조선시대 유골 아닐까?”
2002년 당시 인터넷 언론사 ‘민중의 소리’ 기자로 활동했던 구자환(57)씨는 유골 수십구가 발견됐다는 소식을 듣고 취재하러 갔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2004년 이곳이 국민보도연맹원 집단학살지였다는 사실을 알고, 이때부터 현재까지 20년째 한국전쟁기에 일어난 국민보도연맹원 등 민간인 학살사건 조사에 매달리고 있다.
국민보도연맹은 1949년 6월5일 좌익세력과 관련 있다고 여기지는 사람을 관리하기 위해 이승만 자유당 정권이 만든 관변단체이다. 죄를 묻지 않고 전향의 기회를 주겠다며 회원을 모집했다. 그러나 회원으로 가입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1949년 말부터 지역할당제를 시행했고, 숫자를 채우기 위해 이념과 상관없이 마구잡이로 가입시켰다.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전후 이승만 정권은 이들이 북한에 동조할 수 있다며 군경을 동원해 집단 학살했다.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 수는 정확히 파악되지 않으나, 100만~12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한다.
“2004년 당시 저는 캄보디아의 ‘킬링 필드’는 알고 있었지만, 대한민국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사건은 전혀 몰랐습니다. 대학 교육까지 받았고, 명색이 기자였는데 말이죠. 부끄럽고 당혹스러웠습니다. 이것은 곧바로 분노로 연결됐습니다.”
왜 20년 동안이나 민간인 학살사건을 조사하는지 물었더니, 구씨는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유족과 목격자가 세상을 떠나고 있다. 서둘러 조사해서 기록으로 남기고 세상에 알려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지난 24일 경남 창원시 성산구 상남동의 한 식당에서 그를 만났다.
구씨는 민간인 학살사건을 기록하고 널리 알리는 방법으로 다큐멘터리를 선택했다. 그는 촬영·편집 등 영화 제작기술을 독학으로 익힌 뒤 2015년 ‘레드 툼’, 2018년 ‘해원’, 2022년 ‘태안’ 등 민간인 학살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다큐멘터리 3편을 개봉했다. ‘레드 툼’은 서울독립영화제 우수상, 들꽃영화상 신인감독상을 받는 등 독립영화계의 호평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는 본업인 ‘기자’보다 ‘감독’으로 불리게 됐다. 그는 2019년 기자를 그만두고, 이후 민간인 학살사건을 조사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 그는 네번째 다큐멘터리 ‘장흥 1950’을 올해 9월 완성 목표로 제작하고 있다. 그는 “전남 장흥은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과 국군의 점령과 수복이 거듭되고 빨치산까지 활동하면서, 양쪽의 민간인 학살이 반복·확대된 지역”이라며 “이 작품을 끝으로 민간인 학살사건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과연 그렇게 될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그는 2011년 경상남도 용역 의뢰로 경남대학교 박물관이 수행한 ‘경남 지역 민간인 학살지 전수조사’에 위촉연구위원으로 참여하고, 2021년 4월부터 2022년 5월까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으로도 활동했다. 이를 통해 경남에서만 군경에 의한 민간인 집단학살지 116곳을 확인했다.
최근에는 경남지역 민간인 학살사건을 정리한 책 ‘빨갱이 무덤’을 발간했다. 그는 다큐멘터리 ‘장흥 1950’ 제작을 마무리한 뒤, 민간인 학살사건 조사 20년을 정리하는 의미로 평소 써뒀던 글들을 묶어서 올해 연말쯤 책을 낼 계획이었다. 지난 3월초까지는 계획에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지난 2월 출판 비용을 마련할 생각으로 평소 일기처럼 사용하는 페이스북에 책 출판 계획을 써 올렸다. 이 글에서 그는 민간인 학살사건을 소개하고 이승만을 비판했다.
그런데 지난 3월3일 페이스북 모회사인 메타는 “여러 사용자로부터 페이스북의 정책을 위반했다는 보고를 받았다”며 그의 페이스북 계정을 일방적으로 없애버렸다. 당시 극장가에서는 이승만을 미화하는 다큐멘터리 ‘건국전쟁’이 인기를 끌고 있었다. 여기에 벌컥 화가 난 구씨는 계획보다 7개월가량 앞당겨서 책을 냈다. 제목을 ‘빨갱이 무덤’으로 지은 이유는 “당신들이 빨갱이라고 죽인 사람들이 누구인지 봐라”라고 항의하기 위해서란다.
불과 50여년 전 100여만명의 민간인이 재판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우리 국군과 경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났을까? 왜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는 이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할까?
“남한의 친일 세력은 해방 이후 친미 세력으로 변신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과거를 감추기 위해, 또 집단 공포심을 통치수단으로 삼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민간인 집단 학살까지 말이죠. 따라서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사건은 제주 4·3, 여순사건 등과 역사적 동일선상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한국전쟁 발발 10년 뒤인 1960년 4·19혁명이 일어나자 희생자 유족들은 유족회를 만들고 진상조사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1961년 쿠데타로 들어선 박정희 군사정권은 조사자료를 폐기하고, 심지어 희생자 합동묘까지 없앴습니다. 결국 해방 직후 친일 청산에 실패한 결과인 셈이죠.”
구자환 감독은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사건을 이렇게 분석했다.
그는 현재 자신의 상태를 “할 수 있는 일이 더는 없어 보인다”와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한다” 사이 어디쯤 있다고 했다. 아무래도 올해 9월 다큐멘터리 ‘장흥 1950’ 완성 이후에도 민간인 학살사건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최상원 기자 cs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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