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창 칼럼] 위기의 與, 다 버려야 산다
정치의 요체는 명분과 타이밍, 세(勢)다. 세가지 중 가장 중요한 건 명분이다. 명분이 있어도 타이밍과 세가 없으면 성공하기 어렵다. 명분과 세가 있지만 타이밍이 맞지 않을 때도 마찬가지다. 세가 뒷받침 안되면 힘을 받을 수 없다. 이 세가지가 맞아 떨어질 때 민심을 얻어 승리할 수 있다. 정치는 이 세가지를 어떻게 조합하느냐의 게임이다.
21대 국회 막판 국민연금 개혁안이 쟁점이 됐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보혐료 13%에 소득대체율 44%'안을 불쑥 꺼냈다. 여당안에서 구조개혁을 뺀 모수개혁안만 수용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에게 타결을 위한 영수회담도 제의했다. 결국 구조개혁을 같이 논의해야 한다는 대통령실과 여당의 반대로 무산됐다. 회담도 열리지 않았다.
연금 개혁의 정답은 모수와 구조개혁을 동시에 이루는 것이다. 이 대표의 제안은 분명 반쪽안이다. 그렇다고 틀렸다고 할 수도 없다. 한번에 개혁을 이루는 게 최상이지만 어렵다면 단계적으로 갈 수밖에 없다. 타협이 생명인 정치에선 더더욱 그렇다.
이 이슈를 명분과 타이밍, 세라는 3가지 관점서 풀어본다면 이 대표의 정치적 판정승이다. 무엇보다 명분과 타이밍에서 여권을 압도했다.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 없다는 여권의 말이 맞지만, 적어도 이 대표는 당초 소득대체율 45%에서 한발 물러서 여당이 제시한 44%안을 수용했다. 구조개혁이 빠진 '꼼수'지만 과반의석을 가진 거대 야당이 양보했다는 명분을 부각하기에 충분했다.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시급한 과제라는 점에서 21대서 처리하자는 제의도 명분과 타이밍에서 분명 우위를 점했다. 세에 해당하는 국민여론에서도 득이 많은 게임이었다.
거꾸로 여권의 입장은 궁색해 보였다. 청년세대를 위해 구조개혁을 이뤄야 한다는 원론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내내 침묵하다 국회 문 닫기 직전에 불쑥 들고 나온 것 자체가 정치공세라는 주장도 타당하다. 성과를 이 대표가 독차지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생각도 틀리지 않다. 다 맞는 얘기지만 적어도 국민 눈에는 야당의 양보안을 걷어찬 것으로 비쳐졌을 개연성이 다분하다. 특히 "22대 국회서 근본대책을 마련하자"는 윤 대통령의 가이드라인에 갇혀 옴짝달싹 못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여전히 용산만 바라본다는 지적이 나올 수 있다. 정치적으로 실이 컸다.
여권에 기회가 없었던 건 아니다. 명분도 얻고 실리도 챙길 수 있었다. '22대서 구조개혁도 논의하자'는 이재명 대표의 말을 정치적으로 잘 활용했으면 말이다. 윤 대통령이 이 대표의 회담 제의를 수용하고 '2단계 처리안'을 역제의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이 대표가 제의한 모수개혁안을 21대서 처리하고 구조개혁안은 22대 국회서 올해 안에 처리한다는 합의문에 서명하자'고 했다면 이 대표는 거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연금개혁안 처리 실패의 책임이 이 대표에게 돌아간다는 점에서다. 결국 합의 가능성이 높았다. 이렇게 되면 여권은 개혁안 처리 성과는 공유하고 구조개혁의 주도권을 쥘 수 있었다. 만에 하나 민주당이 반대해 구조개혁안 처리에 실패하면 책임은 고스란히 민주당 몫으로 돌릴 수 있다. 선수를 뺐겼지만 반전을 통한 국면전환의 기회가 있었지만 이를 날린 것이다.
연금 논란은 22대 국회의 예고편이다. 정국 주도권은 물론 거대 야당의 대대적인 정책공세를 함축한다. 지난 대선에서 석패한 이 대표는 중도층 공략에 사활을 걸 것이다. 정책공세는 그런 배경에서다. 이미 시작됐다. 당론을 뒤집는 1기구 1주택의 종합부동산세 폐지를 들고 나왔다. 전국민 25만원 민생지원금도 선별지급 카드를 내밀었다. 특검 등 정치이슈는 힘으로 밀어붙이되 정책이슈는 작은 양보로 여론을 선점하는 전략을 구사하겠다는 계산이다.
정치공세는 몰라도 정책공세에 수동적으로 대처하면 민심을 얻을 수 없다. 국민연금 같은 대처로는 희망이 없다. 달라져야 한다. 범야권이 192석을 가진 상황에서 여당이 국회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무기력하다. 총체적 위기 돌파 방법은 하나다.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것이다. 파괴적 혁신 없이는 불가능하다. 다 버려야 한다. 대통령의 스타일부터 확 바꿔야 한다. 고도의 정치력 발휘는 기본이다. 타깃이 분명한 민생정책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여기에 감동을 주는 파격적인 인사가 더해진다면 국민도 고민할 것이다. 모든 건 자기 파괴라는 혁신의 몸부림을 통한 변화에 달렸다. 시간은 여권편이 아니다. 부국장 겸 정치정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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