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노소영 희비 가른 ‘노태우 비자금 300억’···국고 환수 가능할까?
법원이 지난달 30일 최태원 SK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 항소심에서 1심의 20배가 넘는 재산분할액(1조3808억원)을 노 관장에게 지급하라고 판결한 데에는 노 관장의 선친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이른바 ‘선경(SK의 전신) 비자금 300억원’의 역할이 주효했다. 이번 판결로 노 전 대통령이 SK 측에 건넨 비자금 300억원의 실체가 처음 확인됐지만 이 돈이 불법 자금으로서 국고로 환수할 대상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선 갑론을박이 나온다.
2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300억원의 약속어음 비자금의 존재가 인정된 데에는 노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가 갖고 있던 ‘메모’가 결정적이었다. 김 여사는 1998년 4월과 1999년 2월 두 차례 노 전 대통령이 조성한 비자금에 대해 메모를 작성했다. 두 메모에는 모두 ‘선경 300억’이라고 쓰여 있었다.
재판부는 해당 메모의 신빙성을 인정하고 노 관장 측이 최 회장 측에 준 ‘유형적 기여’ 중 하나로 봤다. 노 전 대통령은 메모에 적힌 액수대로 자신의 동생과 사돈인 노재우·신명수에게 각각 비자금을 맡긴 사실이 추심소송 수사 과정에서 확인됐다. 두 메모에 적힌 비자금 총액이 1998년 687억, 1999년 686억으로 1억원 정도만 차이 난 점도 메모의 증거능력을 입증했다.
노 전 대통령의 ‘선경 비자금 300억원’ 의혹이 사실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해당 의혹은 1991년 최 회장의 선친인 최종현 전 SK 선대 회장이 노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비자금 300억원을 토대로 태평양증권을 인수한 다음 해부터 제기됐다. 의혹으로만 남았던 비자금의 존재는 이후 노 관장이 자신의 이혼 소송에서 김 여사의 메모를 재판부에 제출하면서 32년 만에 입증됐다.
그렇다면 이번에 새롭게 드러난 비자금을 국고로 환수할 수 있는 방법은 있을까. 법조계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노 전 대통령은 비자금에 대한 처벌법인 ‘범죄수익은닉규제법’이 제정되기 10년 전(1991년)에 비자금을 전달했다. 신민영 법무법인 호암 변호사는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제정 이전 행위인 데다, 판결에 기초해 봐도 행위 자체가 1991년에 있었던 일이라 시효가 지났다”고 말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만약 노태우 측이 최종현으로부터 받은 약속어음과 보관 경위가 대외적으로 공개됐다면, 대한민국이 최종현을 상대로도 추심소송을 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비자금의 존재가 일찍 알려졌더라면 국가가 추심을 통해 환수할 수도 있었다는 뜻의 말이다. 그러면서도 “그 당시 사회질서에 반하는 법률행위로 볼 수 없다”며 불법적인 재산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단서를 달기도 했다. 당시 대법원 판례가 약속어음을 주고 받던 관행을 인정해줬기 때문에 불법적으로 볼 수 없고 현재의 법률을 소급적용해 처벌할 수도 없다는 취지의 말이다.
노 전 대통령과 최 전 회장이 사망해 자금 성격을 확인하거나 사실관계를 증명할 수 없는 점도 걸림돌이다. 고윤기 로펌 로우 변호사는 “일단 범죄로 인정돼야 그 수익을 몰수할 수 있는데, 처벌받아야 할 당사자가 이미 없는 상황이라 조치가 어렵다”고 말했다.
정치권 등 일각에서는 국회가 특별법을 만들어 비자금을 환수할 수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1995년 제정된 ‘5·18 특별법’처럼 공소시효가 지난 사안에 대해서도 책임자를 처벌할 수 있도록 특별법을 제정한 사례가 거론된다. 헌법재판소도 5·18 특별법에 대해서는 “공소시효가 지난 범죄라 하더라도 공익과 정의의 원칙에 따라 소급입법이 예외적으로 인정될 수 있다”며 합헌 결정했다. 2019년 국회에서는 전두환 전 대통령 사망 후에도 추징금을 환수하도록 하는, 이른바 ‘전두환 특별법’도 발의됐다.
특별법이 제정되더라도 환수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중론이다. 신 변호사는 “특별법을 만들면 시효 문제는 해결되지만, 당사자와 증거가 없어서 수사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나연 기자 nyc@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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