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어디? 정신을 붙들어

박수진 기자 2024. 6. 2.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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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기획]지도와 나침반 들고 목표지 찾는 ‘오리엔티어링’ “규칙은 있지만 길은 만들어가는 열린 운동”
2024년 5월18일 서울 문화비축기지에서 열린 나이트오리엔티어링 경기에 참가한 김민하 어린이. C코스 13번 컨트롤을 찾아 기쁜 표정을 지으며 다음 컨트롤로 가는 길을 지도를 보고 찾고 있다. 박수진 기자

“긴장된다. 화장실 먼저 갔다 와야겠다.” 이마의 헤드랜턴을 켜고 출발선 뒤에서 대기하던 장한라(32)씨가 혼잣말하며 급히 자리를 떴다. “자, 오늘은 밤이어서 숲으로 들어가는 코스로는 안 짰어요. 길로만 다니세요.” 차윤선(42) 오리엔티어링러버스클럽(이하 오러버스) 대표가 ‘밤 경기’ 참가자들의 긴장을 덜어주려는지 ‘코스가 쉽다’고 알려줬다.

2024년 5월18일 토요일 저녁 7시30분. 서울 마포구 성산동 월드컵경기장역 인근 축구 보조경기장 앞에 출발선이 그어졌다. 국제오리엔티어링연맹(IOF)이 전세계인이 오리엔티어링을 즐길 수 있도록 대회나 행사 진행을 독려하는 ‘세계오리엔티어링주간’(2024년 5월18∼26일)을 맞아 서울·경기 오리엔티어링 동호인 모임 오러버스가 ‘밤 오리엔티어링’ 행사를 열었다.

두뇌와 근육의 콜라보

오리엔티어링이란 지도와 나침반만을 이용해 지도 위에 표시된 목표지점(컨트롤)을 순서대로 찾는 경기다. 목표지점에는 주황색과 흰색으로 된 컨트롤 깃발과 전자카드 인식기가 있다. 컨트롤에 도착해 손가락에 낀 전자카드를 인식기에 찍으면 도착 시간이 기록된다. 모든 컨트롤을 통과해 최종 컨트롤에 빨리 도착하는 순으로 순위가 결정된다.

길을 헤맬수록 뛰는 거리는 길어진다. 달리는 능력과 함께 지도를 정확하게 읽고, 컨트롤에 도착하는 길을 잘 만들어가는 능력이 좋은 기록을 좌우한다. 두뇌와 근육의 콜라보(협업)가 중요하다.

이번이 오리엔티어링 두 번째 경기 참여인 박지미(35)씨가 출발 컨트롤을 찍고 있다. 오러버스 제공

19세기 후반 스웨덴에서 시작된 오리엔티어링은 북유럽을 넘어 유럽 전역에서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잡았다. 국내에서는 1971년 한국산악회가 첫 대회를 연 이래, 지금은 전국 5천 명의 동호인이 이 스포츠를 즐긴다.

해가 완전히 졌다. 경기장 조명과 가로등 불빛만이 밤을 밝히는 8시30분이 첫 출발 시간이다. 이날은 27팀 45명이 참가했다. 출발선에 선 박지미(35)씨는 헤드랜턴 불을 켠 뒤 눈에 불을 켜고 지도를 읽었다. “경기가 시작되면, 내가 지금 어디 있는지, 그리고 다음 목적지는 어디인지 그것만 생각해요. 자칫 딴생각 하면, 다른 곳으로 가게 되거든요.” 연습회를 제외하면 이번이 두 번째 오리엔티어링 참여라는 박씨는 총 20개의 컨트롤이 직선거리 4∼5㎞ 거리에 배치된 A코스에 출전했다.

오리엔티어링은 보통 연령별, 성별, 수준별로 코스가 나뉜다. 자신의 신체 조건과 경기 운영 능력에 맞춰 코스를 정할 수 있다. 55살이어도 신체 능력과 지도를 읽고 길 찾는 능력이 서른 살 수준이라면 35살 코스를 선택하면 된다. 10살이어도 중학생처럼 경기를 할 수 있으면 13살 코스에 출전할 수 있다. 여성 코스에서 계속 1등 하는 여성은 조금 더 도전적인 남성 코스를 선택하기도 한다.

출발은 순차적으로 이뤄진다. 서로 다른 코스를 선택한 2∼3팀(명)이 동시에 출발한다. 동일한 코스를 선택한 참가자들이 서로를 참고하며 경기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첫 팀이 출발하고 1분여 뒤 다음 팀이 출발한다. 이날은 정식 대회는 아닌 만큼, 오리엔티어링 경험자를 대상으로 하는 A코스, 잘 달리는 초보자를 대상으로 ‘달리는 맛’을 느낄 수 있게 설계한 B코스(5∼6㎞), 일반 초보자를 대상으로 한 C코스(3∼4㎞) 3개 코스만 운영했다.

신체 조건, 경기 능력에 따라 코스 선정

2024년 5월18일 오후 7시40분. 서울·경기오리엔티어링 동호인 모임 오러버스가 주최한 나이트오리엔티어링 경기 시작 전, 차윤선 대표가 초보자 교육을 하고 있다. 오리엔티어링 초보자들도 이 교육을 통해 지도 읽는 법, 나침반 사용하는 법 등을 배워 경기를 원활하게 운영할 수 있다. 오러버스 제공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빠와 함께 처음 오리엔티어링을 시작한 김민하(11)양은 가족팀으로만 출전하다가 4학년이던 2023년부터 개인으로 출전했다. 이날은 자타 공인 ‘길치’인 엄마와 팀을 이룬 점 , 밤이라 시야가 넓게 확보되지 않는 점 등을 고려해 쉬운 C코스에 출전했다. 출발과 함께 김양보다 먼저 뛰기 시작한 김양의 엄마는 1번 컨트롤로 가는 갈림길을 만나자마자 헤매기 시작했다. 김양은 나침반과 지도를 들고 우왕좌왕하는 엄마에게 “여기는 나침반 안 봐도 돼 . 지도를 보면 온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가는 길이잖아”라고 말하며 냅다 달려갔다.

경기는 월드컵경기장역 인근 공원에서 시작해 숲을 지나 문화비축기지로 이어지는 코스로 짜였다. 참가자들은 공원에서 숲으로 진입한 뒤 서너 갈래 길 가운데 컨트롤로 향하는 길을 찾을 때, 문화비축기지로 넘어가서 비슷비슷하게 생긴 원기둥형 회색 건물 사이사이 놓인 컨트롤을 찾을 때 특히 어려움을 겪었다.

눈에 불을 켜고 지도에 집중하며 뛰다 걷다 하던 박지미씨는 3번에서 4번을 찾아가다 길을 잃었다. 지도에서 이 지점은 등고선 말고 특별한 표시가 없어, 내가 어디 있는지 알 방법도 없었다. 아무래도 세 갈래 길에서 길을 잘못 택한 느낌이었다. 박씨는 왔던 길을 다시 침착하게 내려갔다. 키 큰 나무들이 빽빽한 밤의 숲 사이에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갈림길에 도착한 뒤 나침반을 꺼냈다. 지도의 북쪽과 나침반의 빨간 바늘을 일치시켰다. 그리고 4번 컨트롤이 있는 길을 다시 찾았다. 길을 잃고 헤맬 땐 결국 내가 어디 있는지, 내 위치를 아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다.

신생아 때부터 부모님 등에 업혀 오리엔티어링을 했다는 핀란드인 아이노 리스티매키씨는 이날 회색 원기둥형 건물 안쪽에 숨겨진 16번 컨트롤을 찾았을 때가 가장 뿌듯했다. “지도에서는 건물 구조가 단순해 보여도, 건물 안에 들어가면 내가 건물 안 어디쯤에 있는지 계속 인지하는 게 어렵더라고요. 핀란드에서는 주로 숲 오리엔티어링을 했는데 이렇게 인공건조물 사이사이에서 컨트롤을 찾는 공원 오리엔티어링도 색다르네요.” 리스티매키씨가 말했다.

내 위치를 아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

오리엔티어링 경기에 두 번째 참가한 이유진·부용씨 부부. 이들은 두 번째 참가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팀웍으로 C코스를 29분37초로 완주해 1등을 거머쥐었다. 오러버스 제공

지치고 힘들 때 멀리서 보이는 주황색/흰색 컨트롤 깃발은 생명수 같다. 남편과 팀을 이뤄 출전한 이유진(33)씨는 17번 컨트롤에서 18번 컨트롤로 올라갈 때 다리를 부여잡고 외쳤다. “나, 더는 못 갈 것 같아.” 지도상에 그려진 등고선 6줄이 17번 컨트롤과 18번 컨트롤 사이에 그려져 있었다. 이미 1번에서 17번까지 3㎞ 정도를 두뇌와 체력을 소진하며 달린 터라 실거리 2m 간격 등고선 6개가 너무나 빽빽하게 보였다. 2023년 처음 남편을 이기겠다고 오리엔티어링 대회에 개인으로 각각 출전했다가 무참히 패하고 분루를 삼킨 쓰라린 기억을 떠올리며 무거운 다리를 겨우겨우 옮기는데, 주황색 컨트롤 깃발이 저 너머 보였다.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주황빛을 타고 이씨의 등을 떠밀었다. “같이 가자, 남편.”

이유진씨와 부용씨 부부는 C코스를 29분37초로 완주해 1등을 거머쥐었다. ‘길치’ 엄마를 이끌고 C코스를 뛴 김민하양은 51분50초가 걸려 등수에 진입하지 못했다. A코스를 42분여가 걸려 완주한 박지미씨는 “4등을 하다니, 행복하다”고 했다. 오리엔티어링을 하면서 등고선을 보고 지도를 읽는 게 재미있어졌다는 그는 “이번 경기로 지도 읽는 능력이 조금 더 좋아진 것 같다”고 기뻐했다.

출발 전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부터 만반의 준비를 했던 장한라씨는 A코스를 37분49초에 완주해 A코스 1등을 차지했다. 2년 전 오리엔티어링을 접한 뒤 올해 본격적으로 즐기기 시작했다는 그는 오리엔티어링이 “길이 정해져 있지 않아 매력적인 스포츠”라고 말했다. “목표지점은 정해져 있지만, 가는 길은 제가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거든요. 평탄한 길이 저에게 잘 맞으면 평탄한 길로 가고, 빽빽한 나무 식생 사이를 비집고 가고 싶으면 그렇게 가면 됩니다. 참가하는 선수에게 여지를 많이 주는, 규칙이 있지만 그 규칙들이 점 같아서 점과 점을 연결하는 선은 제가 그으면 되는 점이 좋아요.”

탁 트인 공간에서 하는 숲스포츠 오리엔티어링은 누구에게나 열린 스포츠다. 차윤선 대표는 2017년 에스토니아에서 열린 ‘세계 마스터스 대회’의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보통 스포츠는 젊은 사람들이 더 빠른 기록을 내는 것에 환호하잖아요. 그런데 그 경기에서는, 백발 어른들이 가장 존중받더라고요. 80살 이상으로 보이는 어르신들이 들어올 때마다 도착지점에서 기다리던 모든 참가자, 관람객이 일어서서 박수 치고 환호하는 축제의 장이 되는 모습에 감명받았어요.” 오리엔티어링의 코스 구분에는 상한 연령이 없다. W65는 여성 65살 이상, M65는 남성 65살 이상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아빠와 함께 경기에 참가한 김예승군이 경기 도중 다음 컨트롤을 찾기 위해 지도를 들여다보고 있다. 나침반을 처음 사용해본 김예승군인 “나침반을 뺑뺑 돌리는 게 어지러웠다”는 재밌는 소감을 남겼다. 오러버스 제공

진입 장벽이 낮은, 누구에게나 열린 운동

오리엔티어링이 빠르고 강한 신체 능력만을 요구하는 스포츠가 아니기 때문에 노인의 지혜를 존중하는 스포츠가 되었다고 차 대표는 설명했다. “오리엔티어링은 지도를 읽으며 자기에게 필요한 정보를 단순화하는 능력, 나침반을 적절히 활용하고, 루트를 선택하고 달리고, 실수를 예방하고 실수를 수정하는 능력 등 여러 기술을 통합해야 합니다. 달리다보면 생각이 날아가는 타입인지, 길을 잃었다고 느끼면 당황하는지, 오른쪽이나 왼쪽으로 치우치는 유형인지 등 자신을 잘 아는 것도 경기 운영에 매우 중요하고요. 경험과 지혜가 중요한 밑거름이에요.” 우사인 볼트라도 길을 잃으면 좋은 기록을 낼 수 없다. 길을 잃어도 다시 정신을 붙들면 좋은 기록을 낼 수 있다.

지도와 나침반만으로 보물을 찾는 맛. “현실판 MMORPG 게임이다. 다음주에 또 할까?” 가장 긴 B코스를 마치고 숨을 헉헉거리며 들어와, 경기장을 떠나던 한 참가자가 친구에게 말했다. “엄마, 나침반 돌리느라 어지러웠어.” 엄마, 아빠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이는 재밌는 소감을 남겼다. 산이 좋아서, 숲이 좋아서, 지도가 좋아서, 나침반이 좋아서, 달리기가 좋아서. 오리엔티어링은 100명이 100가지의 이유로 좋아하는 열린 운동이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오리엔티어링은 19세기 후반 스웨덴에서 군사 목적으로 시작된 뒤 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스포츠로 자리잡았다. 1945년부터 해마다 4월말이나 5월초에 스웨덴에서 열리는 오리엔티어링 릴레이 대회 티오밀라 대회 항공사진. 10 MILA 유튜브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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