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변화에, 날씨 눈치에…꿀벌만큼 바쁜 양봉가 [6411의 목소리]
이순이 | 양봉가
“꽃이 안 피었으니 할 일이 없겠네.” “꿀 다 땄으니 요즘은 한가하겠네.” 양봉을 하면서 자주 듣는 말이다. 참 모르시는 말씀.
양봉가는 5~6월 두달 동안 꿀을 뜨기 위해 열달은 꿀벌을 돌보며 바쁘게 일한다. 양봉을 하다 보니 일곱 요일의 개념은 없어지고 해요일과 바람요일 그리고 비요일로만 구분한다. 공휴일도 주말도 없이 해가 떠 있는 동안은 바쁘게 일한다. 바람요일은 벌통들이나 자재들이 들썩거리고 날아가고 부서지니 봉장을 둘러보며 비상대기하는 날이고 비요일이 되어야 쉴 수 있다. 비요일에 바람이 불면 비 맞으며 사고 수습을 하는 최악의 날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꿀벌들이 월동하는 동안에 농한기의 여유를 누리기는 한다. 하지만 월동기에도 아침이면 보온 덮개를 걷어 꿀벌 나들문을 개방해 주고, 해가 지면 바닥까지 푹 뒤집어씌워야 한다. 월동 기간에도 바람요일은 비상이다. 보온 덮개가 바람을 품고 들뜨면서 한이불 덮은 벌통들이 줄지어 넘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참외 하우스에 수정용 꿀벌을 납품하면서부터는 농한기도 한달 줄어들었다. 1월부터 꿀벌을 키우다 보니 4월이면 꿀벌 군사 수가 넘쳐나면서 분봉 나갈 기미가 보이기 시작한다. 부랴부랴 2단, 3단으로 벌통을 올려 벌통 안의 공간을 넓혀 주고 일주일에 한번씩 내검(내부 관찰)을 한다. 남편과 나는 가장 먼저 먹이가 충분한지 확인하고, 여왕벌의 유무를 확인한다. “여왕벌 여기 있어”라는 말이 가장 반갑다. 벌통 안이 안정돼 있다는 뜻이고, 여왕벌을 잘 모셔 두었으니 그녀가 다칠 걱정이 없다는 뜻이다.
가끔은 여왕벌이 벌집 판인 소비 사이에 끼여 죽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 부부는 두 손으로 책장을 펼쳐 잡듯 소비를 한 장씩 들고 샅샅이 뒤져서 새 여왕벌을 준비한 왕대(여왕벌이 될 알을 받아 벌이 될 때까지 기르는 벌집)를 베어낸다. 여왕벌이 사라진 벌통엔 표시해 두었다가 왕대를 꽂아 준다. 비요일과 바람요일이 계속돼 내검을 못 하는 경우에는 새 여왕벌이 태어나면 옛 여왕벌이 군사의 반을 이끌고 분봉을 나가 버린다. 사고로 여왕벌이 사라진 벌통에는 일벌들이 무정란을 낳기 시작해서 소비가 수벌 집으로 가득 찰 수도 있다. 그런 사고를 막기 위해 늦어도 열흘 안에 한번씩 벌통 속을 들여다봐야 한다.
10년 넘게 그렇게 일하다 보니 손가락 관절과 허리가 남아나지를 않는다. 남편은 꾸부정하게 걷기 시작했고 복대를 차고 일을 한다. 나는 아침이면 아픈 손가락을 주무르면서 봉장으로 나간다. 여왕을 찾거나 산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소비를 들고 하도 들여다봐서 목 디스크도 걱정되는 상황이다.
아프거나 말거나 아까시꽃이 피는 5월이 되었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며 새벽 꿀 뜨기와 야간 이동 그리고 더 자주 내검을 하는 강행군을 감수하며 꿀 많이 뜨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아까시꽃이 어디까지 올라오는지 확인하느라 전국 곳곳에 있는 양봉가들과 날마다 통화를 하고 에스엔에스(SNS)로도 확인한다. 아뿔싸! 전국에 하루이틀 차이로 거의 동시에 꽃이 피고 있다. 게다가 비, 비, 비…. 1차지인 경산에 아까시꽃이 버선발을 내밀고 있으니 어서 오라는데 비 소식이 있다. 비가 내리면 외역봉(일벌)의 날개가 젖어 돌아오지 못하고 밖에서 죽을 수도 있어 이동을 포기했다. 2차지인 안동에 벌통 일부를 이동하려 하는데 3일 동안 비 소식이 잡혀 있다. 봄벌 키우며 먹인 설탕꿀(사양꿀)을 빼내는 정리 채밀을 다 해둔 터라 비가 3일 연속 내리면 꿀벌들이 굶을 수 있다. 빗줄기가 가늘 때 얼른 벌통 안에 비상식량을 넣어 주고 비 맞으며 피어 있는 아까시꽃을 쳐다만 보고 있다. 저렇게 비를 맞고 있다가 갑자기 해가 뜨고 기온이 높아지면 그대로 말라 버리는 수가 있으니 걱정이 태산이다. 아무래도 안동으로의 이동도 포기해야 할 듯하다.
비 때문에 1, 2차지에서 꿀을 뜨지 못했으니 3차지는 전국의 벌쟁이들로 득시글거릴 게 분명하다. 거리도 무시하고 서로가 빤히 보이는 곳에 벌통을 늘어놓을 테지, 곁눈질로 흘끔거리며 꿀을 얼마나 뜨는지 엿볼 테지. 60여통을 가지고 들어갔는데 상대가 200여통을 가지고 들어왔다면 얼른 벌을 빼는 게 상책이다. 대군 쪽으로 꿀벌들이 몰려가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에 적응하랴 날씨 눈치 보랴, 그래도 이동할 채비를 해 두고 긴장하고 있는데 무심한 비는 주책없이 주룩거린다.
※노회찬 재단과 한겨레신문사가 공동기획한 ‘6411의 목소리’에서는 일과 노동을 주제로 한 당신의 글을 기다립니다.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의 원고를 6411voice@gmail.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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