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일 한 통에 16년 다닌 구글서 해고돼…마트 알바생이 된 이유요?"[오늘의 DT인]
美 MBA 마치고 외국계회사 입사
모토로라코리아 등서 홍보·마케팅 업무 담당
구글 퇴사 뒤 트레이더 조 입사…운전·바텐더 등 도전
후배에 "퓨처 셀프 세운 뒤 개인 성장 도모 중요"
잊을 수 없는 2023년 1월 20일.
여느 때처럼 깨자마자 업무 이메일을 확인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려던 차였다. '어? 시스템 오류인가?' 계속되는 로그인 시도에도 회사 계정은 고장이라도 난듯 그의 접근을 튕겨냈다. 다른 개인 계정의 이메일함을 열었더니 마침 회사에서 온 메일이 있었다. "We no longer have a job for you at Google(당신은 더이상 구글에서의 직무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전(前) 구글 본사 임원, 현(現) 미국 실리콘밸리 파트타임 노동자 정김경숙(로이스 김·55·사진)은 16년이 넘게 일하던 구글에서 하루 아침에 정리해고를 당했다. 당시 빅테크 기업들에선 대대적인 구조조정 광풍이 불었다.
그는 미국에서 경영전문대학원 과정(MBA)을 마친 뒤 모토로라코리아와 글로벌 제약사인 한국릴리, 구글 코리아 등 외국계 회사에서 커뮤니케이션과 마케팅 업무를 담당해 온, 기자들에게는 익숙한 베테랑 홍보우먼이었다. 그가 미국 구글 본사로 갔다는 건 2년 전 tvN 예능 프로그램 '유퀴즈'에 출연한 모습을 보고서야 알았고, 그가 구글을 떠났다는 걸 알게 된 건 지난 1년의 이야기를 담아 쓴 '구글 임원에서 실리콘밸리 알바생이 되었습니다'의 출간 소식을 들은 최근이었다.
자난달 31일, 서울에서 만난 그는 다른 사람 같았다. 세련된 여성용 수트를 갑옷처럼 갖춰입은 커리어우먼로 기억되는 그는 민낯에 검박한 티셔츠 차림으로 나타났다. 눈매가 둥글어지는 특유의 미소를 확인하고서야 그를 기억해낼 수 있을 정도였다.
"쉰이 되던 해였죠. 1년에 한 번 구글 본사와 지역법인의 홍보 담당자들이 회의를 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전세계에서 파견되는 특파원이나 각 나라에서 구글 본사로 출장을 가는 기자들을 통합해 관리할 만한 전담팀이 있어야 한다고 했더니 본사에서 바로 채용 공고를 낸 거에요. 제가 관심을 보이니까 '그래 니 아이디어니까 니가 와서 해' 하더라고요."
구글의 국내 검색엔진 시장 점유율이 '1%대' , 구글 코리아의 직원 수가 20명이 안될 때 입사를 했다. 집안 어른들이 '거기 가면 월급이나 제 때 받겠냐'고 했을 때 구글에 합류했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전세계인이 알고 있다. 그는 '로켓'에 비유되는 회사의 폭발적 성장의 목격자이자 한켠의 주역이었다.
구글 코리아에서 12년 반 쯤 됐을 때였으니 일도 익숙했고, 인공지능(AI) 프로그램 '알파고'(AlphaGO)와 이세돌 9단의 대결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내면서 조직에서의 입지도 탄탄했다. 그때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실리콘밸리로 떠났다. 다시 1인팀을 시작으로 구글 본사 글로벌 커뮤니케이션팀의 디렉터가 됐다. 비원어민으로서 커뮤니케이션 부서 임원이 된 건 그가 처음이었다.
"어려서는 굉장히 소심하고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어요. 반장, 회장은커녕 학급 분단장도 한번 해본적이 없어요. 친구를 잘 사귀거나 하지 못하니까 공부는 열심히 했는데, 자존감은 대학에 입할할 때 쯤 바닥이 됐더라고요." 졸업을 하고 국내 기업에 취업을 했고 결혼도 했다. 평범한 모범생 소녀의 평범할 뻔한 일생이었다. 그때 미국으로 유학을 결정했다. 그는 거기서는 다른 사람으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만나는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고, 낯선 사람들과 점심을 먹고, 매 수업마다 질문을 하겠다고 말이다. 이젠 일과가 된 10㎞ 조깅을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배신감이 많이 들었죠. 처음엔 다른 사람에게 갈 해고 통보가 잘못 온 것이라고 생각해서 회사가 다시 불러주길 기다리기도 했어요. 사람이 나쁜 일을 당하면 부정하다가 분노하고 타협, 수용의 단계를 거친다는 말이 맞더라고요. 한 3일 만에 구글이 더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수용하고 나서 지금껏 회사 때문에 하지 못했던, 해보고 싶었던 일을 막 종이에 적었어요. 엄청 많더라고요(웃음)."
목록의 제일 위에 '트레이더 조에서 일하기'가 있었다. 트레이더 조는 좀 이상한 수퍼마켓 체인이었다. 따로 브랜드명이 없이 '초콜릿 입힌 체리'나 '케첩맛 감자칩'처럼 직관적인 이름으로 내놓는 PB(Private Brand) 상품이 80%, 온라인 판매도 배달 서비스도 멤버십도 없다. '너무 이상해서 팔수 없는 것 없다'는 모토로 인도에서 온 냉동 난, 한국의 냉동김밥과 가래떡, 칠리가 들어간 매운 망고주스 같은 것을 팔았다. '식료품의 디즈니랜드' 라고 불리는 미국 1위 수퍼마켓 체인의 정체와 항상 행복해 보이는 직원들이 궁금했다. 평생 마케터로서 살았지만 고객을 직접 대면하는 일은 어떨까 하는 흥미가 생겼다. 제품이 아니라 '나를 마케팅 해보자'는 생각이었다. 바로 지원서를 내고 찾아가서 면접도 봤다.
"트레이더 조에 처음 출근한 날을 잊을 수 없어요. 지금이라도 돌아갈까. 엊그제까지 업계 1위 기업의 임원이었는데 마트 일이라니. 아니 그보다 해본 적 없는 육체노동을 잘할 수나 있을까." 매장 문턱을 넘는 일은 그가 공들여 쌓아 온 성벽을 넘는 일이었고 그가 치열히 살아 온 세계를 건너는 일이었다. 트레이더 조에서 짐을 나르고 물건을 계산해주는 일을 하면서 남는 시간엔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만들고 차량공유 서비스 리프트의 운전사로도 일했다. 바텐더에도 도전했고 도서관과 병원에서도 일했다. 지난 1년 동안 1만명 이상을 만났고, 그가 쉬지 않고 움직이며 발로 뛴 거리도 미국 동서 횡단거리보다 긴 5000㎞가 넘었다.
"기자님은 그 노트북을 뺏으면 어떻게 살 건가요?" 그의 물음에 별안간 뱃속 깊이 눌러놓은 불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직업은 내가 아니고, 회사나 직급은 더 내가 아니고, 긴 시간 갈고 닦아온 수완과 기술은 내가 속한 좁은 세상만 벗어나도 쓸모없는 것이 돼버린다. 부러움을 너머 두려움을 사던 기업가나 고위직 임원조차도 회사 밖으로 나오면 봐줄 사람 없는 은퇴자일테니까. "글쎄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얼버무리는 말에 그는 웃었다. "저도 그렇게 살았잖아요. 그런데 이젠 내가 '내 몸'으로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어요. 세상이 아무리 바뀐다고 해도 그건 바뀌지 않을 거니까."
앞으로 그는 책도 더 쓸 작정이고 지금 진행하는 기업 컨설팅과 스타트업 투자 등 다양한 일도 계속 할 것이란다. 봉사도 하고 쉬기도 할 마음이다. 정해놓은 길은 없지만 변화에 몸을 맡길만한 자신감이 있다.
그처럼 정년에 구애받지 않고 일하고 싶은 여성 후배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다 하는 '퓨처 셀프(미래의 자아상)'를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직의 성장도 중요하지만 개인의 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해요. 반드시 호기심을 열어놓고요. 뭐든 하던 일만 하려고 들지 말고, 그리고 당장 100%가 아니어도 도전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회에 눈을 돌려서 자원봉사나 기부를 한다면 더 좋을 것 같아요."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재능 있고 운까지 좋은 사람의 세속적 성공기가 아니라 평범한 소녀의 찬란한 도전기였다. 회사 명함을 잃고도 혼자 생존하기를 연습 중인 월급쟁이의 분투기였다. 사회의 편견을 통쾌하게 부수며 누구도 넘은 적 없는 경계를 위태롭게 오가며 주어진 운명을 바꾸고 인생이란 게임을 즐겨 온 이야기였다. 다음에는 그가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하다.
이윤희기자 stels@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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