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가려면 100명 모여야”…호랑이 무섭던 ‘이 고개’ 지금은 6차선 도로 뻥 뚫렸네 [서울지리지]
![고갯길(1906~1907년). [국립민속박물관(헤르만 산더 기증사진)]](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407/16/mk/20240716112105018vfqo.jpg)
서울은 외사산(外四山·북한산, 관악산, 덕양산, 용마산), 내사산(內四山·북악산, 남산, 인왕산, 낙산)이 감싸고 산줄기 사이사이의 골짜기 마다 하천이 흘러 청계천, 한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지형이다. 이에따라 언덕과 구릉지가 발달한 대신 너른 평야가 많지 않다. 이같은 지형적 특성상 서울에는 수많은 크고 작은 고개가 존재했다. 유독 서울 지명 중에는 고개를 뜻하는 현(峴)이나 령(嶺), 치(峙‧티), 재자가 들어간 지역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다. 여러 사료를 종합하면, 서울에는 모두 230개 이상의 고개가 있었던 것으로 집계된다.
![무악재(1906~1907년). 몇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큼 폭이 좁다. [국립민속박물관(헤르만 산더 기증사진)]](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407/16/mk/20240716112106432hgal.jpg)
![무악재(1993년 7월 촬영). 1935년부터 시작해 여러차례 확장공사가 이뤄졌다. [서울역사편찬원]](https://img3.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407/16/mk/20240716112107849znfq.jpg)
이수광(1563~1628)의 <지봉유설>에 따르면, 풍수지리적으로 북한산의 부아암(負兒岩·인수봉)이 밖으로 뛰쳐나가는 형세여서 아이가 도망가지 못하게 달래기 위해 안산을 어미산(母岳·모악)이라고 지었고 차츰 무악이라는 명칭으로 자리잡게 됐다. 시대에 따라 무악재를 포함해 모래재(沙峴), 길마재, 모화현(慕華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명칭됐다. 모래재, 즉 사현은 고개 북쪽 홍제동에 신라시대에 창건된 사현사(沙峴寺)라는 절에서 기원한다. 길마재는 두 봉우리 사이가 잘룩해 마치 길마(말안장)처럼 생겼다는 뜻이고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 곧 안현이다. 고개 아래에 중국사신이 머물던 모화관(서대문독립공원)이 있어 고개이름을 모화현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무악재는 인조때 반란을 일으킨 이괄(1587~1624)의 군대가 패배한 장소다. 부원수 겸 평안감사 이괄은 인조반정에서 가장 공이 컸지만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1624년(인조 2) 음력(이하 음력) 1월 24일 반란을 일으켰다. 1만2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한때 한성까지 점령했지만 천혜의 군사요충지 무악재를 차지한 관군을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고 경기도 광주까지 도주했다가 부하에게 살해되고 난도 진압됐다. 무악재는 1935년부터 시작해 1960년대 후반까지 여러 차례 확장공사를 통해 도로가 6차로로 넓어지고 경사도도 크게 낮아졌다.
도성 안에도 도처에 고개였다. 경복궁 오른편에 널찍한 공간이 펼쳐진다. 열린송현녹지광장이다. 일제강점기 식산은행 사택, 해방후 미군 숙소, 미대사관 숙소 등으로 사용되다가 삼성, 대한항공을 거쳐 2021년 12월 서울시에 소유권이 넘어간 땅이다. 현재는 광장이 조성돼 시민들에게 개방되고 있다.
송현녹지광장과 종로 중학동 사이의 고갯길이 송현(松峴) 또는 솔재였다. <태조실록> 1398년(태조 7) 4월 16일 기사는 “(송현의) 산등성 소나무가 마르므로 그 가까이 있는 인가를 철거하라고 명령하였다”고 했다. 송현의 소나무는 국가에서 보호할 만큼 울창했음을 알 수 있다. 송현에는 남은(1354~1398)의 집(현 종로 중학동 트윈트리타워빌딩 B동)이 있었다. 남은은 태조의 막내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적극 간여했고, 그로 인해 제1차 왕자의 난 때 목숨을 잃었다. 실록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집에 정도전, 심효생 등과 머물다가 이방원 일당의 습격을 받아 함께 피살됐다.
![도성도 중 송현(조선시대). 광화문 앞 오른편에 솔재, 즉 송현이 보인다. 현재는 광화문 앞으로 율곡로가 뚫려있지만 조선시대 송현은 소나무가 무성하고 험준한 고갯길이었다. [국립중앙박물관]](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407/16/mk/20240716112109284ytkm.jpg)
![운현궁(2015년 촬영) 고종의 잠저인 종로 운현궁이다. 그 뒷편으로 현대건설 사옥이 보인다. 운현(구름재)은 운현궁과 현대건설 사옥 사이의 고갯길이다. [문화재청]](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407/16/mk/20240716112110731slmy.jpg)
배오개시장 상인들은 1905년 물밀듯 밀려드는 일본자본에 맞서기 위해 광장주식회사를 설립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시장인 광장시장이다. 오늘날 광장시장과 동대문시장(국립중앙의료원 북쪽), 동대문종합시장을 통칭하는 ‘동대문시장’은 배오개시장에 그 뿌리를 둔다.
인왕산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뻗어내려오는 산줄기에 차례로 고개가 만들어졌다. 마포의 대현(大峴), 애오개, 중구의 만리재가 그 줄기에 있다. 대현은 서대문사거리에서 아현동을 통과해 신촌으로 넘어가는 큰 고개다. 1940년대만 해도 대현 고개는 배추, 무, 호박밭 일색이었다. 대현고개 마루는 몹시 가팔랐지만 조선초부터 존재했던 아주 오래된 고갯길이다. 대현을 넘으려면 고개 밑에서 소나 말에게 물을 먹이고 대장간에서 굴레(가축 머리에 씌우는 틀)를 갈아줘야 했다. 2호선 아현역 일대에 개천이 흘렀고 개천 위에는 다리가 놓여있었다. 다리 주변의 대장간에서 굴레를 교체했다고 해서 이 지역을 굴레방다리라고 했다.
애오개는 서대문사거리에서 충정로역을 거쳐 마포로 넘어가는 고개다. 애오개 일대에 지하철 5호선 애오개역이 있어 지금도 위치를 찾기 쉽다. 한자는 아현(阿峴 또는 兒峴)으로 표기한다. 아현은 위쪽의 대현과 아래 만리재, 두 고개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아 애(아이)고개라고 했고 애고개는 다시 애오개로 변화한 것으로 알려진다. 아현에 아이 시체를 많이 묻어 아이 묻은 고개라는 의미로 애고개라고 불렀다는 말도 있다.
![도성쪽에서 마포 방향으로 진출하는 고갯길. 대현은 빨간색, 만리재는 보라색, 그리고 이 두개의 큰 고개 중간의 작은 고개인 애오개가 파란색으로 표시돼 있다. [카카오맵 갭쳐]](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407/16/mk/20240716112112124jfsp.jpg)
![만리재 도로(1974년 12월 15일 촬영). 1974년 12월 만리동 고개와 마포구 공덕동 오거리를 잇는 신설도로가 개통됐다. [서울역사박물관]](https://img2.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407/16/mk/20240716112114206qugj.jpg)
만리재는 동대문·서대문·남대문 등 삼문 밖에 사는 주민과 애오개 주민들이 두 패로 나뉘어 돌을 던지거나 몽둥이를 휘두르며 싸우는 석전(石戰)으로 이름났다. 만리재 석전풍속은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 상술돼 있다. 이 싸움에 용산과 마포사람들이 애오개편에 가세해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고갯길 입구의 성황당(일제강점기). [국립민속박물관(송석하 기증사진)]](https://img4.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407/16/mk/20240716112115630ncpl.jpg)
용산 당고개는 용산꿈나무종합타운(옛 용산구청·원효로 1가)에서 성산감리교회(신계동)으로 넘어가는 문배산(현 신계역사공원) 고갯길이다. 현재 고개는 없어졌고, 문배산 정상까지 주택가가 형성됐다. 문배산 오른편으로 지금은 모두 복개됐지만 인왕산 서쪽에서 발원해 독립문 영천시장, 서소문 밖 네거리, 서울서부역, 삼각지고가차로를 거쳐 원효대교 아래로 빠지는 만초천(蔓草川)이 흘렀다. 만초천 변에서 헌종 5년(1839) 기해박해 때 많은 수의 천주교인들이 순교했고 당시 처형장은 순교성지로 조성돼 있다.
미아리고개는 흘러간 가요 덕에 유명해진 고개다. 성북구 동선동(지하철 4호선 성신여대입구역)에서 돈암동으로 올라가는 미아로(현 동소문로)에 위치했다. 서울에서 의정부로 가는 길목의 첫번째 큰 고개며, 반대로 북쪽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문턱이다. 북한산 칼바위 능선 아래의 미아사라는 절 이름을 따왔다.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대가 이 길을 넘어왔다고 해서 되너미고개로도 지칭됐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북한군이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미아리고개를 따라 서울로 쳐들어왔다. 북한군은 퇴각할때도 이 길로 도망갔다. 그러면서 ‘단장의 미아리고개’ 노랫말처럼 서울의 무수한 인사들을 강제로 끌고 갔다.
조선시대 미아동 일대는 배밭과 호박밭이 흔했다. 고개는 도보로만 이용할 수 있었을 만큼 경사가 심했다. 일제강점기 이후 삼양로 좌우 야산과 미아 3·4동은 일대에 한국인 전용 공동묘지가 형성돼 미아리 하면 서울사람들에게 공동묘지를 연상시켰다. 미아리고개는 주거단지 개발을 앞두고 1960년대 확장공사가 대대적으로 이뤄졌다.
![망우산에서 바라본 망우동 전경. 망우리에는 여행자들을 위한 대규모 주막거리가 형성됐다. [배한철기자]](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407/16/mk/20240716112117108njrg.jpg)
현재의 도로가 생기기 전까지 해발 100m의 높은 지대였고 꼬불꼬불한 S자형의 길이었다. 망우로와 용마산길이 교차하는 망우사거리 일대는 주막거리가 형성됐다. 험준한 망우리 고개를 넘은 길손들은 서울로 들어가기 전 주막거리에서 여독을 풀며 하루 저녁을 묵었다. 관리에서부터 과거응시자, 보부상, 수레꾼, 죄인 등 천차만별의 사람들이 주막거리를 이용했다. 망우리고개 남쪽에는 1933년부터 지정된 망우리 공동묘지가 있다. 망우리 묘지는 서울의 공동묘지로 사용되던 미아리 묘지가 포화조짐을 보이자 1933년 조성하기 시작해 1973년 매장이 금지되기까지 총 2만8500기의 분묘가 들어섰다.
남태령(南泰嶺)은 사당사거리에서 경기도 과천으로 뻗어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가 되는 큰 고개다. 남태령길은 충청, 경상, 전라의 삼남(三南)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다. 1930년대 초까지만 해도 지금의 과천대로 오른편의 우면산 쪽으로 나 있는 산길이었으며 산적이 출몰해 행인을 나무에 묶고 달구지에 실었던 짐이나 소를 빼앗아 달아나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지금의 남태령로는 1935년 관악산 자락을 깎아 개설했다. 그후 남태령 옛길은 인적이 거의 끊겼지만 최근 과천시가 옛길을 복원했다.
남태령 옛길의 원래 명칭은 여우고개(狐峴·호현)였다. 남태령은 여우들이 관악산과 고개를 넘나들었고, 천년묵은 여우가 사람으로 변신해 고개에 나타났다는 전설도 남아있다. 남태령 지명은 정조때 처음 생겼다.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인 화성 현륭원으로 행차할 때 고개에서 쉬면서 고개 이름을 묻자 변 씨 성의 과천현 이방이 요망한 명칭을 아뢸 수 없어 ‘남행할 때 첫 번째 큰 고개’라는 뜻으로 남태령이라고 거짓 보고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정조는 이방을 칭찬했고 이를 계기로 고개는 남태령이 됐다.
비록 고개는 사라졌지만 고개명은 동네이름으로, 또는 지하철역 이름으로 여전히 남아 친숙함을 준다. 고갯길에는 우리 선조들의 애환과 삶의 숨길이 배어있는 많은 전설들도 전래돼 온다. 고갯길은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보고다.
<참고문헌>
1. 조선왕조실록. 지봉유설(이수광). 동국세시기(홍석모)
2. 서울의 고개. 1998.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3. 서울지명사전. 2009.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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