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 뻔한 2020통의 편지... 14년 묻혔던 한중일 타임캡슐[문지방]
편집자주
광화'문'과 삼각'지'의 중구난'방' 뒷이야기. 딱딱한 외교안보 이슈의 문턱을 낮춰 풀어드립니다.
"이것 봐, 2010년 한중일 어린이들이 우리한테 남긴 편지래.
우리도 답장을 해보자!"
한중일 어린이 합창단, 5월 27일 한중일 정상회의 만찬 행사에서
2019년 이후 5년 만에 한중일 정상회의가 열렸습니다. 지난달 26일 3국 정상회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모인 만찬장. 3국 다문화 어린이 21명이 공연을 펼칩니다. 합창단 앞엔 오래된 편지 몇 장이 펼쳐져 있습니다. 2010년 세 번째 한중일 정상회의를 맞이해 제주도에 묻었던 '타임캡슐'의 봉인이 해제된 순간이었습니다.
2010년 5월 30일 제주 국제컨벤션센터(ICC JEJU) 야외 조각공원. 당시 한중일 정상은 10세 한중일 3국 어린이 2020명이 10년 뒤 3국 협력을 생각하며 쓴 편지를 묻었습니다. 10년 뒤 다시 열어보자고 그 자리에서 약속했죠.
안타깝게도 이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2020년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경색된 한일‧한중관계로 인해 3국 정상회의가 계속 미뤄지면서 타임캡슐은 ICC 조각공원에 묻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난해 한중일 정상회의 준비를 위한 협의가 재개되면서 정부는 묻혀있던 캡슐을 꺼내 서울로 가져왔습니다. 9차 한중일 정상회의 개최 장소가 서울로 확정됐기 때문이죠.
"이젠 청년이 된 한중일 청년이 자신이 묻었던 편지를 14년 만에 읽어봤다면 어떤 기분이었을지 감정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한중일 정상회의 만찬 참석자가 남긴 말
오랫동안 타임캡슐을 지켜본 한 인사는 본보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의 목소리엔 아쉬움이 한껏 남아 있었습니다. 한중일 미래꿈나무 21명의 화답노래도 아름다웠지만, 장성한 당시 2020명의 아이들 중 일부라도 와서 자신이 쓴 편지를 읽고, 자신이 지금 생각하는 동북아시아는 어떤지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사실 정부의 생각도 그랬습니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지난해 ICC 조각공원을 찾아 캡슐을 꺼내간 이유입니다. 그래서 정부도 2010년 같이 타임캡슐을 묻었던 한중일 아동 2020명을 수소문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뿔싸. 예상치 못한 복병을 만났습니다.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같이 캡슐을 묻었던 아동들이 현재 어디에 거주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는 것 자체가 불법인 것입니다. 중국과 일본에라도 협조를 구해봤습니다. 중국과 일본도 "그때 나왔던 아이들을 어떻게 다시 찾느냐"며 난처한 반응을 내놨다고 합니다.
전시회는 어떨까. 마찬가지로 개인정보보호법에 걸린다고 합니다. 당시 타임캡슐을 묻었던 한중일 청년들이 나서주지 않는 이상 그들이 꿈꾼 '친구 한중일'의 그림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이지요. 그렇게 아쉬움을 뒤로하고 현재의 한중일 어린이들이 14년 전 어린이들의 마음을 이어받아 부른 것이 바로 우리 동요 '무지개빛 하모니'였습니다.
"우리들의 모습 모두 다르지만 마음의 문 열고 한마음 이루어요.
서로 감싸주고 서로 아껴주는 무지개빛 고운 하모니……."
동요 '무지개빛 하모니'에서
한중일 타임캡슐을 둘러싼 우여곡절을 듣고 나니 지난한 3국 정상회의 개최 과정이 떠오른 건 왜 일까요. 코로나19와 복잡해진 국제정세 속에서 참으로 어렵게 3국 정상회의가 열렸습니다. 국제정세가 어려워지고, 동북아시아에서의 관행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달라지면서 한중일 정상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습니다. 3국 정상이 모이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을진대 정치‧사회‧경제‧문화 다방면에서 하나의 합의를 이루는 작업은 더욱 험난하겠지요.
그래서 이번 한중일 정상회의는 무너지는 대화체계를 심폐 소생시켰다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아무리 다툼 소지가 큰 환경에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만나야 한다는 것을 3국 정상이 확인했으니까요. 그리고 이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만난 이유는 딱 하나, '미래 세대'를 위해서입니다.
빛바랠 뻔했던 타임캡슐을 어렵게 성사된 3국 정상회의 덕분에 그 가치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4년 전 타임캡슐에 묻은 아이들과 오늘날 한중일 어린이들이 담은 화합에 대한 열망을 어떻게 실현해줄지 우리 어른들이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미래 세대가 더 이상 불안정한 대외 정세에 피로감을 느끼지 않고 희망을 노래할 수 있도록, 한중일 정상회의가 동북아시아 정세 안정의 시작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문재연 기자 munj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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