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 FTA, 신냉전 ‘완충 외교’ 출발점…조급해진 김정은은 또 도발
(시사저널=정대진 원주 한라대 교수)
"나에겐 정말 시간이 없소."
김정일의 유언처럼 전해지는 말이다. 2011년 12월 사망하기 전에 함경남도 현지지도 현장에서 김정일은 이 같은 말을 남겼다고 한다.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후 숨 가쁘게 후계 작업을 하던 40개월의 마지막 말이었다. 운명처럼 다가오는 순간을 직감하고 후계를 서두르던 조급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그 후계자 김정은도 요즘 들어 부쩍 조급해 보인다. 5월26~27일 한·중·일 정상회의에 대한 신경질적인 반응과 27일 북한의 위성 발사 실패 이후 시간에 쫓기는 듯한 태도가 확연하다.
4년5개월 만에 서울에서 열린 한·중·일 정상회의는 오랜만에 열린 만큼 다방면에 걸쳐 많은 합의를 선언했다. 38개항에 걸쳐 1705개 낱말, 5703자라는 정상회의치고는 꽤 긴 공동선언을 남겼다. 애초 이번 한·중·일 정상회의는 4년이 넘는 공백을 메울 구체적 성과가 나오기 어렵다는 관측이 많았다. 그동안 동북아 정세가 급격히 변화했고 특히 한일 간 밀착에 비해 중국과의 관계는 소원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시작된 역내 단절에다 북핵의 고도화, 미·중 경쟁의 심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등 각종 악재가 이어졌다. 동북아 역내 안보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하고 불확실한 면이 증대했다.
따라서 새로 재개된 한·중·일 정상회의는 긴 공백기 끝에 새로운 소통과 접촉의 기회를 마련했다는 것 자체에 의미를 더 크게 두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한일은 명목으로나 실질로나 정상인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참석하는 반면 중국에서는 시진핑 주석이 아닌 실권 없는 리창 총리가 참석하는 점도 큰 기대를 갖기 어렵게 했다. 다만 한·중·일 3국이 그동안 '신냉전'으로까지 비유되며 격화된 역내 긴장과 불안정성의 완충망을 마련하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기대하는 목소리가 있는 정도였다.
격화된 역내 긴장 낮춘 한·중·일 정상회의
그런 면에서 봤을 때 이번 한·중·일 정상회의는 나름 제 몫을 충분히 다했다고 할 수 있다. 3국 정상이 "자유롭고 공정하며 포괄적이고 높은 수준의 상호 호혜적인 FTA 실현을 목표로 하는 3국 FTA의 협상 속도를 높이기 위한 논의를 지속"하기로 한 점은 눈에 띈다. 또한 시기를 못 박아 "2024년까지 완전하고 원활하게 작동하는 분쟁 해결 제도 마련을 포함한 WTO의 모든 기능을 개혁하고 강화할 것을 약속한다"고 합의한 점도 3국의 공통 이익인 자유무역 확대에서 확실한 공통분모를 재확인했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만하다. '신냉전' 운운하며 위기감이 고조되던 시기에 미·중 관계를 두고 횡행하던 디커플링(decoupling·탈동조화) 우려가 지난해부터 디리스킹(derisking·위험 완화) 논의로 수준이 완화된 가운데 한·중·일 3국도 디리스킹과 공동의 이익 확보에 나서는 모양새다.
서로의 민감한 현안에 대해서는 "역내 평화와 안정(중국), 한반도 비핵화(한국), 납치자 문제(일본)에 대한 입장을 각각 재강조하였다"는 정도로 넘어갔다. 한·중·일 협력이 '신냉전' 파고를 넘어 자유무역 분야에서 협력을 제도화하며 새로운 항해에 나설 준비를 갖추고 있는 국면이다. 지난 몇 년간 '신냉전' 프레임에 기대어 왔던 북한으로서는 다급해질 수밖에 없는 시국이다. 5월27일 밤 실패로 끝난 인공위성 발사 시도도 무리한 택일이 아니었을까 싶은 추정이 가능하다. 기술적으로 완벽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중·일 정상회의에 대한 재 뿌리기, 특히 중국에 대한 불만 토로 성격으로 서둘렀다고 의심해볼 만한 여지가 없지 않다.
특히 중국이 참여한 정상선언에서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이 나온 것을 북한이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을 공산이 크다. 5월27일 북한은 외무성 담화를 통해 한·중·일 정상회의 공동선언을 "자주권에 대한 정면도전"이라며 "한국이 주도하는 국제회의 마당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헌법적 지위를 부정하는 엄중한 정치적 도발이 감행됐다"고 비판했다. 사실상 중국까지 싸잡아 비난하며 자신들이 받은 충격을 고백하고 있다. 중국이 참석한 정상회의에 대해 북한이 공개적으로 비난한 건 이례적인 일로, 박근혜 정부였던 2015년 9월 한중 정상회의에 대한 비난이 거의 유일하다.
또한 정상회의 공동선언 중 "3국이 유엔 안보리 이사국으로 함께 활동한다. 유엔 안보리 등 다자간 협력 체제에서도 긴밀히 소통할 것임을 재확인한다"고 명시한 것도 북한은 예민하게 볼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한·중·일이 FAT를 가속화하고 교역을 확대해 가겠다고 하는데 북한 대외 교역량의 절대량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이 유엔 대북 제재 이행에 일정 부분 협조하겠다는 듯한 입장을 취한 것은 북한으로서는 여간 신경 쓰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에 충격받은 北
게다가 이번 위성 발사는 러시아 기술 지원을 받았다는 것이 정설인데 북·러 협력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도 미지수다. 올해 11월 미 대선 이후 러시아의 대미 관계 불확실성이 사라지고 새로운 대미 관계 조성과 우크라이나전 마무리를 위한 협상에 들어간다면 북한의 효용가치는 당연히 떨어진다. 북한으로서는 그런 시나리오가 펼쳐지기 전까지 러시아로부터 최대한의 지원과 기술을 확보해야만 한다. 김정일이 했다는 "시간이 없소"란 말이 김정은 입에서도 맴돌고 있을 상황이다. 그리고 내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지 않기를, 그리고 '신냉전'의 파고가 다시 한번 더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없다는 강박관념에 위성 발사 실패 이후 북한은 더욱 예민해진 모습이다. 실패를 만회하고 대내 결속과 대외적 존재감 과시를 위해 무더기 대남 풍선 살포와 탄도미사일 발사도 감행했다. 이전부터 준비해 오던 군사적 카드였겠지만 위성 발사가 성공했다면 이렇게까지 연속적으로 다급하게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북한을 둘러싼 이러한 구조적 상황을 북한 스스로도 알 것이기에 더욱 초조해 보인다. 만약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계속되고 역내 정세가 불안정하다고 해도 이 불안정에 기대어 자신들의 안정을 구해야 하는 불안정의 역설이 계속 북한 앞날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자력갱생과 강 대 강 맞대응을 그렇게 외치지만 결국은 외부 정세와 다른 나라의 지원에 의존해야만 하는 초라함만 남을 뿐이다.
한중 관계는 현실적으로 미·중 관계에 연동될 수밖에 없다. 그간 한국은 북핵에 맞서 한미 동맹, 한·미·일 협력을 강화하며 미·일에 맞춘 중국 견제의 목소리를 냈고, 그 결과 중국과 외교적 갈등을 빚었다. 하지만 '한·미·일 대 북·중·러' 대결은 한국으로선 피해야 할 구도다. 이번 회의를 계기로 미·중 사이에 낀 존재가 아니라 충돌을 완화하고 역내 협력 메커니즘을 만드는 교량 국가로서 한국의 외교력을 보여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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