곳곳에 유전자 변형곡물: 다양성 잃은 시대의 덫 [전쟁과 문학]
바빌로프의 삶과 비극적 최후
세계 최초 종자은행 설립한 인물
인류의 최후 대비했던 식물학자
전세계 누비며 토종 씨앗 모았지만
스탈린에게 구속돼 굶주리다 사망
유전적 다양성 지킨 신념 이어져야
다양성을 잃은 세계는 작은 타격에도 위기를 겪는다. 이것은 식물과 동물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적용되는 진리다. 오늘날 많은 기업이 더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해 다양성을 무시하면서 유전자 변형 곡물을 판매한다. 이런 탐욕은 인류의 공존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 지금 세상의 풍경은 인류의 굶주림을 해결하고자 했던 위대한 식물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를 생각하게 한다.
1941년 독일군이 소련의 제2 도시 레닌그라드로 접근하자 소련군은 레닌그라드 '에르미타시 박물관'이 소장한 200만점의 미술품들을 후방으로 옮기려고 분주했다. 그러나 독일군이 노린 것은 에르미타시 박물관이 아니라 '종자연구소'였다.
종자연구소는 러시아의 세계적인 식물학자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바빌로프(1887~ 1943년)가 1894년부터 수집한 38만개가 넘는 발아 가능한 씨앗과 뿌리, 열매를 보관하고 있었다. 소련을 점령해 게르만족의 '레벤스라움(Lebensraumㆍ생활권)'을 확보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던 히틀러는 유전학에 무척 관심이 많았다.
게르만족의 생활권을 유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을 비롯한 생태 자료였다. 히틀러는 끝내 종자연구소를 차지하지 못했다. 레닌그라드는 900일 동안 이어진 포위에도 항전을 포기하지 않았고 종자연구소를 지켜냈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바빌로프는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유전학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러시아 북부 농지에 퍼진 '흰가루병'으로 농작물 작황이 크게 나빠졌다. 전선의 병사들은 굶주렸고, 러시아 국민의 민심은 극도로 악화했다. 이런 상황은 1917년 공산주의 혁명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페트롭스키 농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바빌로프는 흰가루병에 저항성을 가진 밀 종자를 찾는 데 성공해 서른살의 나이에 농업학교 교수로 임용됐다.
바빌로프는 1920년대부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각 지역의 풍토에 적응해 살아남은 식물들의 씨앗을 수집했다. 그는 파미르 고원, 남미의 열대우림, 사막과 고원지대까지 샅샅이 조사하면서 각 지역에서 자라는 생물들과 음식 문화를 조사했다. 그의 발길은 식민지 조선까지 닿았다. 바빌로프의 자료에는 한국의 인삼과 콩을 언급한 내용도 있다.
또한 수분이 없는 모래언덕에서 자급자족하며 살아가는 호피족과 나바호족, 변화하는 기후에 탄력적으로 대응해 작물을 돌려 심는 농부들의 지혜를 자료로 남겼다. 종자연구소를 세운 바빌로프는 천재지변이나 큰 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으려면 식량의 안정적 확보가 최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세계의 과학자들과 지식을 공유해 미래의 식량 위기에 대비할 '세계종자연구소'를 세우는 것이 바빌로프의 원대한 꿈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집권하자 모든 것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형질이 이어진다는 생물학의 기본 전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것은 마치 귀족의 자녀가 부모의 계급을 그대로 물려받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스탈린의 성향에 정확히 부합하는 생물학자가 등장했다. 그는 트로핌 리센코(1898~1976년)였다. 리센코는 어떤 종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자라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획득형질 유전'을 주장했다. 이런 리센코의 학설에 스탈린은 큰 관심을 보였다.
바빌로프는 유전학에서 환경적 요인의 중요함을 인정하면서도 리센코의 주장을 실제 종자연구에 적용하려면 훨씬 더 많은 자료와 시간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중요한 것은 리센코의 주장은 '과학'이 아니라 '계급의식'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스탈린의 총애 아래 리센코가 학계를 장악하자 바빌로프는 1937년 모스크바에서 국제유전학회를 열어 리센코의 오류를 입증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스탈린은 학문적인 논쟁과 자료의 과학적인 검토조차 반역 행위로 규정했다. 소련 정부는 학회를 취소하고 바빌로프를 체포했다. 자료 수집을 핑계로 해외를 돌면서 국가기밀을 빼돌린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죄목이었다.
당시 소련은 농촌의 식량을 징발해 도시 노동자에게 공급하고 있었다. 농촌에는 식량 부족이 만성화했지만 리센코의 학문은 전혀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래도 스탈린은 끝까지 리센코를 옹호하면서 바빌로프와 동료들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체포된 바빌로프는 400여회에 이르는 고문을 받은 후 사형 선고를 받았다. 혹독한 고문에도 바빌로프는 자신의 과학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국제사회의 비판이 높아지자 부담을 느낀 스탈린은 바빌로프의 사형을 집행하지 않고 바빌로프를 사라토프 지역의 감옥에 가뒀다. 1943년 바빌로프는 사라토프의 감옥에서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인류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던 과학자가 아사餓死한 것이다. 바빌로프의 사망 소식을 접한 미국의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과학역사 최악의 사기극'이라고 개탄했다. 스탈린 시대의 잔혹한 아이러니였다.
바빌로프의 동료들도 레닌그라드에서 종자연구소를 지키다가 대부분 전사했다. 반면 리센코는 자신의 학문적 승리를 선언하며 승승장구했고 소련의 과학계에서는 바빌로프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지됐다.
바빌로프의 업적이 다시 빛을 본 것은 스탈린이 사망한 이후였다. 바빌로프의 연구소는 'N. I 바빌로프 식물산업연구소'라는 이름으로 개칭했고, 1987년에는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도 열렸다.
지금 세계는 바빌로프가 우려했던 파국을 향해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고 있다. 바빌로프가 평생 연구하면서 찾아낸 식량 위기의 유일한 해결책은 '다양성의 존중'이다. 다양성이 소멸한 세계는 작은 타격에도 위기를 겪는다. 이것은 식물과 동물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적용되는 진리다.
오늘날 기업들은 더 많은 수익을 내려고 다양성을 무시하면서 유전자 변형 곡물을 판매한다. 기후변화로 식량가격이 폭등하면서 인류의 공존이 심각하게 위협받고 있다. 지금도 바빌로프의 연구를 이어받은 학자들은 전 세계 식물의 유전적 다양성을 지키려고 고군분투하고 있다.
2008년 노르웨이에 들어선 '스발바르 국제 종자 저장고'가 대표적 사례다. 전 세계 모든 재래식물의 종자가 영하 18도 상태에서 보존된 이곳은 '현대판 노아의 방주'로 꼽힌다. 아마도 우리의 다음 세대는 그 방주의 문을 열어젖힐지도 모른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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