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이익 낸 일본 대기업, 역대급 도산한 일본 중소기업
엔·달러 환율은 지난 4월 29일 160엔을 터치한 뒤 한 달이 흐른 5월 29일 기준 157.25엔으로 다시 내려왔다. 그러나 엔화 가치는 여전히 약세다. 엔저 현상이 일본 경제에 결과적으로 좋은 영향을 가져다줄지 나쁜 영향을 끼칠지에 대한 논의가 계속해 이뤄지고 있다. 일본에선 ‘나쁜 엔저론(悪い円安論)’ 혹은 ‘좋은 엔저론(良い円安論)’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엔화의 장점이 단점보다 크면 ‘좋은 엔저’, 그 반대의 경우 ‘나쁜 엔저’가 된다. 엔저 현상은 달러 등 외화벌이를 하는 기업의 엔 환산 이익을 끌어올리지만 일본 내에서 사업을 영위하는 회사들엔 큰 타격을 입힌다. 희비가 엇갈리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일본 상장사의 지난해 순이익은 3년 연속 사상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다. 최근 니혼게이자이신문이 도쿄증시 프라임 상장사 1071곳의 2023회계연도(2023년 4월~2024년 3월) 실적을 집계한 결과 순이익은 46조8285억 엔(약 408조원)이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20% 증가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전체 기업 중 65%가 순이익이 늘었다”며 판매 증가와 가격 인상, 경기 회복 등에 따른 실적이라고 분석했다. 상장사 전체 이익 증가분의 47%를 차지해 실적을 끌어올린 분야는 ‘완성차 및 부품업체 순이익’이다. 심지어 도요타는 일본 기업 중 최초로 영업이익 5조 엔을 돌파했다. 가격 인상, 북미 판매 호조의 영향도 있지만 ‘좋은 엔저’의 효과를 봤다고 풀이된다. 혼다, 스즈키, 마쓰다 등도 덩달아 역대 최대 이익을 거뒀다.
이에 일본 일각에선 ‘좋은 엔저론’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무사 료지 무사리서치 대표는 엔화 약세가 ‘일본 대부흥’의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수출 경쟁에서 유리해 수출이 늘고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등 장기적으로 경제가 다시 살아날 것이란 전망에서다. 일부는 과거 엔화 강세가 유발한 경기침체를 돌이켜보기도 한다. 엔고가 기업들의 비즈니스 기회, 고용, 자본 등 해외 유출을 촉진하고 임금 하락 압력을 가하면서 디플레이션에 빠졌다는 논리다. 대규모 금융완화를 진행해 이른바 ‘망국 정책’으로 지적받는 아베노믹스를 뒷받침하는 의견이기도 하다.
日 기업 도산, 올해 총 1만 건 전망 나와
엔화 약세로 웃는 기업도 있으나 쓰러지는 기업도 우수수 나온다. 일본 상공회의소의 고바야시 겐 회장은 5월 9일 기자회견에서 “비명이 들린다”고 호소했다. 그 중심엔 내수로 사업을 지탱하는 중소기업들이 있다. 이어 그는 “협력적 개입이든 위장 개입이든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전망 있는 경제 환경을 만드는 게 국가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도쿄상공리서치는 올해 일본의 기업도산(부채액 1000만 엔 이상)이 지난해와 비교해 10% 이상 늘어 총 1만 건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작년 기업 도산의 경우 전년 대비 31.6% 증가한 9053건으로 집계됐다. 작년과 비교해 증가율은 둔화할 것으로 예측되나 증가세는 올해를 포함해 3년 연속으로 이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도모다 노부오 도산통계 총괄 정보본부장은 “원자재 가격 상승과 인력 부족으로 수지 압박을 받아 자금난에 시달리는 사례가 잇따를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엔화 약세로 경영난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의 현장 상황을 지난 5월 12일 전했다. 도쿄 오타구의 한 자동차부품 생산 공장은 플라스틱 성형 가공 기술로 사업을 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전쟁 등으로 유가가 급등하자 원자재 구매 비용 상승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에 생산 공정 효율화와 제품 가격 인상으로 버티고 있었으나 엔저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 회사의 다케모토 모리야 사장은 “올봄 직원 임금을 올려주기는 힘들 것 같다”고 토로했다.
도쿄상공리서치가 지난 2월 실시한 조사에서 원자재 상승분은 40% 미만, 인건비 증가분은 50% 미만으로 나타났다. 가격 인상으로 원자재와 임금 상승을 방어할 수 없다고 풀이된다. 인력 확보를 위한 임금 인상도 큰 영향을 미쳤다. 도쿄상공리서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인력난으로 인한 도산 건수는 전년 대비 2.1배 늘었다.
코로나19 관련 여파도 여전하다. 지난해 팬데믹 관련 부도는 총 3127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36.3% 증가했다. 전염병 관련 대책으로 사실상 무이자·무담보 ‘제로제로 대출’을 제공한 프로그램 종료 이후 파산 건수가 전년 대비 1.4배 증가했다. 도쿄상공리서치는 “2024년 4월쯤 무이자 대출 상환이 정점에 이르러 더욱 많은 기업이 자금 조달에 어려움을 겪게 돼 올해 기업 도산 건수가 1만 건을 넘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엔저에 타격 받았다는 日 기업 ‘3곳 중 2곳’
일본 당국도 엔화 약세가 초래할 부정적 여파를 우려하고 있는 듯하다. 스즈키 순이치 재무상은 5월 28일 “엔화 약세가 수출 기업들의 실적에 도움을 주지만 수입 물가를 끌어올려 기업과 소비자에게는 부담을 준다”며 “우리는 임금 상승 속도가 물가상승 속도를 앞서게 만드는 정책 목표를 추구하고 있는 이상 현재 시점에서 엔화 약세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기업정보데이터 업체 데이코쿠데이터뱅크가 지난 5월 10일부터 15일까지 1046개 기업을 대상으로 엔화 약세의 영향을 조사한 결과 매출에 ‘긍정적’이란 답변은 16%, ‘부정적’ 35%, ‘변경없음’은 49%였다. 반면 이익에 대해선 ‘긍정적’이 7.7%, ‘부정적’ 63.9%, ‘변경없음’은 28.5%라는 결과가 나왔다. 기업 3곳 중 2곳은 엔화 약세가 기업의 이익에 부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한 특산품 판매업체는 “엔저로 수입 시계와 주얼리 가격이 폭등해 소비자 신뢰도가 떨어지고 매출도 줄었다”고 말했다. 건축자재, 가구, 도자기 등을 다루는 도매업자는 “구매가격 인상분을 판매가격에 전가하자 소비자 욕구가 위축됐다”고 밝혔다. 심지어 일본은 장기간 디플레이션이 지속돼 가격 인상을 꺼리는 문화다. 원자재 가격 상승을 소비자에게 온전히 전가할 수도 없게 된 셈이다.
해당 설문조사에서 회사에 맞는 적정 환율이 어느 정도인지 묻는 질문엔 ‘120~129엔’이 28.9%로 가장 많았고 ‘110~119엔’이 21.2%로 뒤를 이었다. 절반가량은 110~129엔 범위에 있어야 한다고 응답했는데 이는 150엔 후반대를 맴돌고 있는 현재 환율과 큰 괴리가 있다.
윤소희 인턴기자 ys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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