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가도 백악관 간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은밀한 사생활과 이를 감추려 했던 정황을 두고 6주 가량 ’막장 드라마’처럼 펼쳐졌던 형사사건 재판 절차가 마무리됐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이른바 ’성추문 입막음용 돈 전달’ 사건을 맡은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 배심원단은 2024년 5월30일(현지시각) 검찰 쪽이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제기한 34개 혐의에 대해 모두 유죄로 평결했다. 최대 징역 4년형에 처해질 수 있는 범죄다.
미국에서 전직 대통령이 형사사건에서 유죄 평결을 받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다. 재판부는 최종 선고 기일은 7월11일로 정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을 대선 후보로 확정할 공화당 전당대회(7월15~18일)가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열리기 꼭 나흘 전이다. 2024년 11월 미국 대선, 아니 미국 민주주의가 전대미문의 상황으로 빨려들고 있다.
메스 든 변호인과 망치 든 검찰의 싸움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성추문 입막음용 돈 전달’을 둘러싼 의혹은 크게 3가지다. 모두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됐던 2016년 대선을 앞두고 벌어진 일이다. 첫째, 트럼프 전 대통령은 과거 성관계를 한 ‘성인영화’ 배우 스토미 대니얼스의 입을 막기 위해 13만달러를 지급했다. 둘째, 장기간 내연관계였던 ’성인잡지’ 모델 겸 배우 캐런 맥두걸의 입을 막기 위해 15만달러를 지급했다. 셋째, 과거 가사도우미와 외도해 자녀까지 낳았다는 (나중에 거짓으로 밝혀진) 정보를 공개하겠다고 한 ‘트럼프 타워’ 경비원 출신 디노 사주딘을 만류하기 위해 3만달러를 지급했다. 핵심은 대니얼스에게 전달된 돈이다. 검찰 쪽은 대니얼스에게 줄 불법자금을 조성하고 이를 감추기 위해 모두 34건의 허위문서를 작성한 혐의로 트럼프 전 대통령을 기소했다.
배심원단의 평결에 앞서 5월28일 오전 맨해튼 형사법원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 형사재판의 마지막 절차인 최후변론이 열렸다. 이번 재판의 백미였다. 무죄를 주장하는 변호인 쪽과 유죄를 주장하는 검찰 쪽은 배심원단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전혀 다른 전략을 짰다. <뉴욕타임스>는 “변호인 쪽이 외과 수술용 메스를 들이댔다면, 검찰 쪽은 잘 벼린 칼 대신 해머를 휘둘렀다”고 전했다.
선공에 나선 건 트럼프 전 대통령 쪽 토드 블랜치 변호사다. 그는 3시간 가까운 최후변론 내내 검찰 쪽 핵심 증인으로 나섰던 트럼프 전 대통령의 심복이자 개인 변호사 출신 마이클 코언을 ‘거짓말쟁이’로 몰아가는 데 집중했다. 2016년 대선 당시 트럼프 전 대통령의 ‘해결사’였던 코언은 2018년 12월 선거자금법 위반 등의 혐의에 대해 유죄를 인정해 징역 3년형에 처해진 바 있다. 코언은 재판에 출석한 검찰 쪽 증인 20명 가운데 마지막으로 출석해 나흘에 걸쳐 증언과 반대심문에 응했다.
배심원단 12명 민주당 성향 큰 맨해튼 거주
코언은 재판에서 대니얼스에겐 자신이 직접, 맥두걸과 사주딘에겐 트럼프 전 대통령의 오랜 친구이자 타블로이드 신문 <내셔널 인콰이어러>의 발행인이었던 데이비드 페커와 협의해 돈을 건넸다고 증언했다. 특히 코언은 ‘입막음용 돈’ 지급은 “보스(트럼프 전 대통령)한테 승인받고 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페커 역시 증인으로 출석해 “트럼프 전 대통령을 위해 기삿거리를 돈 주고 산 뒤 보도하지 않았다”고 했다.
블랜치 변호사는 코언을 두고 “복수에 혈안이 된 탐욕스러운 거짓말쟁이”라고 몰아갔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코언이 트럼프 전 대통령의 취임 직후인 2017년 2월 법률자문과 각종 업무 추진비용으로 42만달러를 사후변제 받았는데, 이 가운데 온라인 여론조사 업체에 지급해야 할 비용 5만달러 가운데 3만달러를 코언이 착복했다는 점도 밝혀냈다. 코언 역시 반대심문에서 “약속한 보너스를 삭감해 화가 났다”며 이를 시인했다. 다만 그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처벌받기를 원하지만, 경제적으로만 따지면 무죄로 석방되는 게 나한테 유리하다. 할 말이 훨씬 많아지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코언은 트럼프 전 대통령을 비난하는 인기 팟캐스트·유튜브 채널 ‘내 탓이오’(메아 쿨파)를 운영 중이다.
같은 날 오후 2시께 시작된 조슈아 스타인글라스 검사의 최후변론은 6시간여 이어졌다. 그는 먼저 “코언이 과거에 한 거짓말은 모두 트럼프 전 대통령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그가 사후변제 받은 돈은 ‘입막음용 돈’을 돌려받은 것이지, 법률자문료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실제 검찰 쪽은 코언이 대니얼스에게 준 ‘입막음용 돈’ 내역이 담긴 은행잔고증명 사본을 트럼프 전 대통령의 회계 책임자가 사후변제 당시 관련 서류에 포함했다는 점을 ‘가장 확실한 증거’(스모킹 건)로 제시했다. 코언이 자기 돈으로 ‘입막음용 돈’을 지불하고,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를 나중에 갚았다는 얘기다.
최후변론 종료와 함께 배심원단은 평결 숙의에 들어갔다. 유·무죄에 대해 배심원단이 만장일치를 이뤄야 공표가 가능하다. 배심원단 12명은 모두 맨해튼 거주자다. 맨해튼을 포함한 뉴욕시는 민주당 지지 성향이 압도적으로 높다. 실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된 2016년과 낙선한 2020년 대선 때 뉴욕시에선 민주당 후보 지지율이 각각 79%, 76%를 기록한 바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쪽에 불리한 요소였다. 트럼프 전 대통령 쪽이 재판 전부터 뉴욕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 관할권 이전을 요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옥중 출마 뒤 ‘셀프 사면’할 수도
“정치적 탄압이자, 민주당의 음모다.” 이틀 간의 숙의 끝에 배심원단이 내놓은 유죄 평결을 두고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렇게 주장했다. ‘진보 성향 뉴욕 시민 12명’이 자신을 탄압한다는 인상을 심어, 지지층을 결집시키기 위한 주장이다. 실제 그는 2023년 8월24일 별도의 형사사건으로 기소돼 조지아주 풀턴 카운티 구치소에 출두해 ’머그 숏’(피의자 식별용 사진)을 찍었을 때도, ’정치적 탄압’을 내세워 지지층한테서 거액의 선거자금을 모금한 바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 변호인단도 벌써부터 항소를 벼르고 있다. 항소심 절차는 최소 6개월이 걸린다. 미국 대선은 5개월 뒤에 치러진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도전에 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가 평결 직후 “진정한 심판은 11월5일(대선일) 유권자가 내릴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다.
미국 형사재판에서 배심원단은 유·무죄만 가린다. 유죄 평결이 나더라도 형량은 재판부가 정한다. 후안 머천 재판장은 재판 과정에서 ‘함구령 위반’을 이유로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 쪽에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정치적 부담’ 탓에 머천 재판장이 실형을 선고하고 트럼프 전 대통령을 구금할 가능성보다 집행유예 또는 벌금형을 선고할 가능성이 높다는 전망이 유력하다. 일부에선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선 후보인 탓에 재판부가 주중에는 선거운동을 허용하고, 주말에만 구금하는 방식을 택할 수도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돼도 트럼프 전 대통령은 대선에 출마할 수 있다. 미국 헌법은 대선 출마 자격을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15년 이상 거주한, 35살 이상’으로만 규정한다. 전과 유무는 출마 자격과 무관하다. 설령 트럼프 전 대통령이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돼 수감되더라도 옥중 출마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실제 1920년 대선 당시 방첩법 위반으로 혐의로 1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던 사회당 후보 유진 데브스가 옥중 출마해 약 100만표를 득표한 바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옥중 출마로 당선된다면? 그야말로 ‘미지의 영역’이다. 미국 수정헌법 제25조에 따라 대통령이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 내각 과반의 동의로 부통령이 직무를 대행할 수 있다. 내각의 절반이 임명권자의 뜻을 거스를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셀프 사면’을 시도하거나, 대통령직 수행을 명분으로 ‘형 집행 정지’ 소송을 벌일 수도 있다. 이럴 경우 보수파가 다수인 연방대법원이 최종 결론을 내리게 된다. 이래저래 트럼프 전 대통령으로선 ‘해볼 만한 싸움’이란 얘기다.
5월29일 정치전문 매체 <리얼클리어 폴리틱스>가 종합한 최근 실시된 8개 전국 단위 여론조사 결과, 트럼프 전 대통령은 조 바이든 대통령을 1.1%포인트 앞섰다. 특히 애리조나·위스콘신 등 ‘8대 격전지’(스윙스테이트)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모두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0년 대선 때 바이든 대통령은 이들 격전지 8곳 중 노스캐롤라이나를 뺀 7곳에서 간발의 차이로 승리한 바 있다. 바이든 대통령이 열세임은 분명해 보인다. 숱한 ‘사법 리스크’에도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 가능성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어 보인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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