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청년·유색인종들도 지지…극우 ‘내셔널리즘’에 눈 돌리는 유럽 중도층
(시사저널=김휘동 유럽 통신원)
유럽의회 선거가 약 2주 앞으로 다가오자 정당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720명의 유럽의회 의원을 선출하는 이번 선거의 화두는 단연 '정치 양극화'다. 최근 로버트 피코 슬로바키아 총리 피격 사건은 깊어진 유럽 정치 양극화의 결과물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피코 총리 자신 또한 한 달 전 "대표급 정치인이 살해당할 정도의 상황"이라며 현재의 극단적 정치 양극화에 대해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결국 이 발언은 피코 총리 자신이 피격당하며 현실이 됐다.
유럽의 정치 양극화는 어디서 시작됐을까. 극우와 극좌 정당들은 수년 전부터 존재해 왔으나 중앙 정치무대에서 주목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이들은 '내셔널리즘'을 표방하며 다양한 형태의 국가와 민족주의를 내세워 약진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들이 환영받지 못해온 서유럽에서조차 이제는 평균 약 20%대의 개별 국가 의석 점유율을 가지고 있다.
유럽 내 극단적 성향을 보인 정당을 떠올린다면 '스킨헤드'나 '네오나치'를 이야기하거나 공개적인 동성애 혐오와 반(反)기후 위기론을 주장하는 이들을 지칭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유럽 극우·극좌 정당들은 다양한 현안에 대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며 유럽 중도층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극우 정당이다. 이들은 중도 유권층을 포함해 과거 배척의 대상이었던 비유럽 이민자 배경의 유색인종의 지지까지 끌어내고 있다.
슬로바키아 총리 피격, 정치 양극화의 산물
이들이 중도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기반에는 현안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기성 정치에 대한 유권자들의 실망과 반감이 있다. 특히 집값 상승과 난민 유입 그리고 생활물가 상승은 지난 수년간 유럽연합을 관통하는 공통의 문제였다. 난민에게 투입되는 예산과 제공되는 거처 등 혜택으로 비칠 수 있는 정책들은 집값 상승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유럽인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겼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유가 상승은 유럽인들의 지갑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탈리아 보코니대학교 카트린느 드 브리스 교수는 극우 정치인들이 이러한 상황을 절묘하게 이용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극우 정당들의 메시지를 보면 이들은 기성 정치권을 '유럽을 파멸로 이끄는 정치'로 정의하고, 기존 '엘리트'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유권자의 목소리를 귀담아듣지 않으며, 특히 극우 정당 자신들만이 유럽을 모든 면에서 더 나았고 안전했던 과거의 '좋은 시대'로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을 골자로 한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러한 '반기성정치'(anti-establishment) 메시지는 단순한 정치 스펙트럼을 떠나 '내셔널리즘'을 표방한 대부분의 정당에서 나타난다고 봤다. 그는 이러한 극단의 메시지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된다고 봤는데, 특히 중도 유권자 사이에서 존재론적 불안감을 조장해 기성 정치에 대한 반감을 증가시킨다고 평가했다.
그는 극우 정당들은 이러한 '불안감'에 대한 해결책으로 특정 집단의 '퇴출'을 제시한다고 봤다. 즉 다양한 이해관계가 섞인 현안 과제들을 특정 집단의 '퇴출'로 단순화시킨 것이다. 이들만 사라지면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메시지에 중도 유권자들은 어떤 평가를 내릴까. 중동 출신 이민자 배경을 가진 독일의 한 유권자는 극우로 평가받는 '독일을 위한 대안'을 지지하는 이유에 대해 "나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지만, 현 상황을 만들어낸 기성 정치에 실망한 것이 이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라며 "세금을 꼬박꼬박 납부하며 성실히 살아왔지만, 집값 상승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이제 막 독일에 온 난민이 주택을 지급받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라고 했다.
작년 11월 네덜란드 총선에서 극우로 평가받는 자유당에 투표한 한 유권자는 "극우 정당이 표방하는 모든 것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기성 정치는 유권자들이 가장 우선순위로 생각하는 집값 상승, 난민 유입 문제에 대해 이렇다 할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며 "극우 정당 대표가 연정을 대표하는 총리로 선출되는 것에는 반대하지만, 극우 정당에 투표하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고 했다.
중도층, '유럽연합 탈퇴' 주장에는 부정적
기존 극우 정당을 지지해온 골수 지지층에는 더 극단적인 메시지가 전달되고 있다. 지난 4월 독일 동부 소도시 마그데부르크에서 열린 정치 토론 행사에 다녀온 '독일을 위한 대안' 지지자에 의하면 "당에 대한 '중국 스파이 스캔들'은 자신들의 치솟는 인기를 두려워한 집권당의 '가짜뉴스'이자 '계략'이라는 사실을 정치인에게서 들었다"면서 "주요 언론들은 제대로 된 사실을 보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고 정부와 주요 언론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실제 유럽 내 극우파 정당 소셜미디어는 그들만의 '사실'을 내세우고 특정 집단을 배제하지 않으면 유럽이 '멸망'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극우 정당들의 공통된 서사는 '반기성정치'에 기반한 '내셔널리즘'이며 이들이 추구하는 정책의 방향 또한 유럽연합의 영향력 축소와 회원국의 주권 강화 및 더 나아가 유럽연합 탈퇴를 의미한다.
극우 정당들이 불안감 조장을 통해 유럽 선거에서 중도 유권자들의 표심을 어느 정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중도 유권자 대부분은 유럽연합 체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중도층이 기성 정치에 실망해 국내 선거에서 극우 정당에 투표했어도 극우 정당들이 유럽연합 탈퇴를 주장하는 이상 유럽연합 선거에서 이들에게 투표하기는 아직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다. 미국의 정치 일간지 폴리티코가 취합한 유럽의회 선거 여론조사는 720석 중 친유럽연합에 해당하는 거대 정당인 중도우파 '유럽 국민당 그룹'과 '사회민주진보동맹'이 각각 174석과 144석을 얻을 것으로 전망했다. 극우로 평가받는 '정체성과 민주주의'와 '유럽 보수와 개혁'은 각각 84석과 70석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양극화가 악화될 것이라는 우려 섞인 전망도 있다.
런던 소재의 한 싱크탱크 관계자는 "이번 선거에서 기존 '친유럽' 성향의 대규모 연정이 유지는 되겠지만 득표율은 지난번보다 떨어질 것"이라며 "탄력을 받은 극우 정당들은 상대적으로 적은 득표를 하더라도 지난 선거보다는 더 높은 득표를 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추세라면 이들의 극단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중도층 또한 점차 늘어날 수 있다"고 내다봤다. 특히 "선거 후 유럽 시민들이 체감할 수 있는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극우의 주장에 동조하는 유권자의 증가로 이어질 것이며, 불안감 조성에 의한 유권자들의 폭력성도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며 유럽 정치 양극화에 대해 우려 섞인 전망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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