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컬처의 부흥, ‘나의 소원’은 이뤄진 걸까? [역사의 뒤 페이지]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김구, 〈백범일지〉, ‘나의 소원’ 중).
백범 김구(1876~1949)처럼 널리 존경받는 한국인도 드물다. 그가 남긴 글 중 가장 널리 인용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로 시작하는 이 짧은 글은 한 구절 한 구절이 모두 명문이다. 서두의 문단도 그렇다. 과장하자면 ‘나의 소원’은 한국인이 쓴 글 중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 다음으로 많이 인용되는 글이 아닐까 싶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9년 신년 기자회견 연설을,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라는 인용으로 마무리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2021년 11월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문화 강국’ 건설을 약속했다. ‘나의 소원’의 저 문장들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오늘날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케이팝과 케이드라마 등 케이컬처 열풍과 맞물려 백범의 저 ‘아름다운 소원’은 갈수록 더 자주 소환되며 우리 가슴을 뜨겁게 데우곤 한다.
이광수가 ‘윤문’한 〈백범일지〉 논란
도서출판 국사원에서 발간된 〈백범일지〉 초판 출간일은 1947년 12월15일이다. 해방과 분단, 새 나라의 건설을 둘러싼 국내외 세력들 사이 갈등으로 정국이 말할 수 없이 긴박하던 때였다. 그해 3·1절에는 처음으로 좌익과 우익이 따로 기념식을 열었고, 시가행진 중 양쪽이 폭력으로 충돌했다. 7월에 몽양 여운형이 피살되고, 8월에 좌익 인사 1000여 명이 검거됐다. 10월에는 몽양과 김규식, 안재홍 등이 추진하던 좌우합작위원회가 붕괴했다.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도 최종 결렬됐다. 12월2일, 백범과 맞서던 한민당 지도자 장덕수가 백범 추종자들에게 피살됐다. 백범은 암살 배후로 조사받고 재판까지 받는다. 12월22일, 백범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결연히 천명한다.

〈백범일지〉는 이토록 숨 가쁜 시절에 출간됐다. 이제 상식적인 의문 하나. 백범이 차분히 기억을 더듬으며 자서전 쓸 겨를이 있었을까? 당연히 없다. ‘저자의 말’에서 밝혔듯 〈백범일지〉 ‘상편’은 상하이 임시정부 시절 고국의 아들들에게 유서 대신 쓴 것이고, ‘하편’은 중일전쟁 중 충칭(중경)에서 민족독립운동의 경륜과 소감을 밝힌 것이다. 하편 말미에 해방과 귀국 후 일정을 소략하게 덧붙였다. 이 상하편과 별도로 “민족에게 하고 싶은 말의 요령”과 “우리 민족 철학의 대강령”을 ‘나의 소원’으로 새로 적었다고 밝힌다.
그리 바쁜 시절에 썼건만 ‘나의 소원’은 문장도 명문이고 거론하는 사상의 범위도 놀랍다. 레닌과 마르크스, 파시즘과 나치즘, 공자, 석가, 노자, 예수, 단군의 홍익인간, 헤겔의 변증법, 포이에르바흐의 유물론, 애덤 스미스의 노동가치론,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학설이 등장한다. 백범은 정말 대단한 사상가였던 것이다. 잠깐만, 정말로? 백범이 훌륭한 인물이었다고 해도 학자는 아니었다. 문장도 저리 매끄럽지 않았다. ‘나의 소원’을 백범이 썼을까? 학계의 중론은 아니라는 쪽으로 모인다. 그럼 누굴까? 정설은 한 명을 지목한다. 바로 ‘친일파’ 이광수(1892~1950)다.
논란은 ‘나의 소원’을 넘어 〈백범일지〉 자체의 저자 문제로까지 확대된다. 〈백범일지〉는 원래 백범이 국한문혼용체로 쓴 친필 원고를 쉬운 문장으로 옮기고 풀어서 출판한 책이다. 그 윤문을 이광수가 맡았다. 백범의 아들 김신의 증언으로 밝혀진 일이다. 읽기 어려운 글이니 윤문, 즉 글 다듬기는 당연하다. 윤문에 그쳤는지, 내용까지 고쳤는지, 고쳤다면 어느 정도인지가 문제다. 1997년 〈백범일지〉 친필 원고 공개 이후 학계의 논쟁거리가 됐다. 윤문 이상임은 분명해졌다. 고쳤으되 본래 취지 그대로라는 의견과 취지가 바뀌었다는 의견이 갈린다.
〈백범일지〉 본문의 첫 장인 ‘우리 집과 내 어릴 적’에 대한 논란을 보자. 아들들에게 주는 유서 격의 글이니 집안 내력으로 시작한다. 먼저 이광수의 윤문을 거친 국사원판이다.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어떻게 고려 왕건 태조의 따님 낙랑 공주의 부마가 되셔서 우리들의 조상이 되셨는지는 삼국사기나 안동 김씨 족보를 보면 알 것이다. 경순왕의 팔세손이 충렬공, 충렬공의 현손이 익원공인데 이 어른이 우리 파의 시조요 나는 익원공에서 이십일대 손이다. 충렬공, 익원공은 다 고려조의 공신이어니와 이조에 들어와서도 우리 조상은 대대로 서울에 살아서 글과 벼슬로 가업을 삼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리 방조 김자점이 역적으로 몰려서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매….”
윤문 이전의 친필 원고는 어떨까? “조선(祖先)은 안동 김 성이니 김자점씨의 방계라. 당시 자점씨가 반역죄로 전 가족이 멸망을 당할 시에….” 참으로 간략하다. 국문학자 방민호는 김구의 원고 전반이 신분차별에 대한 강렬한 반감에 차 있고, 평등사상에 입각해서 서두도 저렇게 간략히 시작했다고 본다. 반면 양반 가문의 내력을 길게 밝히는 국사원판은 “(이광수가) 일종의 소설적 구성 쪽으로 본래의 자서전을 새롭게 만들려 한 의도가 엿보인다”라는 것이다(‘김구 자서전 〈백범일지〉와 이광수 ‘윤문’의 의미’, 〈춘원연구학보〉 17, 2020).

다른 견해도 있다. 〈백범일지〉의 주해본을 최초로 출간하고, 친필 원고를 탈초한 〈정본 백범일지〉를 출간하기도 한 역사학자 도진순은 고쳐 쓴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본다. 안동 김씨는 구안동과 신안동 두 종류가 있는데, 서로 혈연적 연관성이 없어서 결혼까지 가능하다. 조선 후기 세도가인 신안동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백범은 구안동 출신이었다. 구안동은 경순왕의 후손이니 백범이 왕족임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신안동과 구별하려 한 데 본뜻이 있다는 것이다(‘해제 〈백범일지〉 조직 검사’, 〈정본 백범일지〉, 돌베개, 2016).
이 외에도 몇 가지 논란이 더 있다. 상식적으로는 이광수가 고쳤다고 해도 백범이 승인했을 터이니 결국 백범의 뜻이라고 볼 수 있지만,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백범이 과연 꼼꼼히 읽고 최종 승인했는지, 심지어 이광수가 윤문했음을 알았는지도 논란이 있다. 〈백범일지〉를 깊숙이 연구한 도진순은 “이광수에 의한 악의적 왜곡은 거의 없다”라고 말한다.
다만 부록 격인 ‘나의 소원’은 경우가 다르다. 이 글은 백범의 친필 원고가 아예 없다. 주해본 〈백범일지〉나 정본 〈백범일지〉에 ‘나의 소원’이 없는 이유다. 이광수가 썼거나, 이광수의 생각이 상당히 반영된 글이라는 데 이견이 별로 없다. 이광수가 이 시기 글을 모아 낸 수필집 〈돌벼개〉(1948) 중 마지막 글인 ‘내 나라’ 내용 중에서 상당 부분이 ‘나의 소원’과 비슷하다고 알려져 있다. 문화의 힘에 대한 강조, 외래 사상에 대한 경계, 강렬한 반공 사상 등 줄거리 뼈대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돌벼개〉 서문에서 이광수는 ‘내 나라’ 등 마지막 세 편의 글이야말로 자신의 철학을 밝힌 글이라고 쓰고 있다. ‘나의 소원’은 백범보다는 이광수의 철학이 집약된 글일 가능성이 높다.
존경받는 독립운동가인 백범의 가장 유명한 글이 대표적인 친일파 이광수의 작품이거나, 그의 생각이 상당히 투영된 글이라는 주장은 우리를 매우 불편하게 한다. 백범에 대한 좌우의 비판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곤 하는 이유다. 이 글에서 따지려는 주제는 이것이 아니다. 내게는 그 논란 너머 어떤 ‘시대정신’의 문제가 더 중요해 보인다. 같은 시기 일본으로 눈길을 돌려보자.

1945년 패전 직후 일본에서 발족한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내각의 과제는 단연 일본 국가의 재건이었다. 신생 일본의 지침으로 전면에 내건 것이 바로 ‘문화’였다. 마에다 다몬 문부상(문부장관)은 “일본이 갈 길은 단 하나다. 무력을 갖지 않는 대신 문화로 간다”라고 선언했다. 1945년 9월5일자 ‘평화국가’ 제하의 사설에서 〈아사히신문〉은 일본은 다시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문화로 살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문화력의 회복’이야말로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1950년대를 거치며 일본인 사이에서 문화력에 대한 자부심이 다시 높아지고, 민족주의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자연·향토·전통을 사랑하는 ‘메이드 인 재팬’ 민족주의가 부상했다(朴祥美, 〈帝国と戦後の文化政策: 舞台上の日本像〉, 2017).
패전 후 성립한 일본의 신헌법과 교육기본법 등에서 문화국가는 평화국가, 민주국가와 함께 일본이라는 국가의 이념형으로 제시됐다. 평화·민주·문화를 추구한다는 좋은 말에 무슨 문제가 있을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늘 그렇듯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문화국가는 19세기에 출현한 법치국가, 사회국가, 복지국가 등 국가의 바람직한 모습을 규정한 국가이념 중 하나였다. 일본은 메이지 시대에 독일에서 문화국가 개념을 수입했다. 이때 문화국가는 국가가 자유로운 문화 창달을 보장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는 국민정신에 의해 통일된 도덕적 유기체이며, 국가의 존재 의의는 그 고유 문화를 대표하는 데 있다는 헤겔의 ‘초개인적 국가주의’가 ‘문화국가’ 사상으로 수용된다. 이 사상이 기타 잇키(1883~1937) 등 우익 군국주의자와 결합하고, 다시 ‘신체제 운동’과 결합한다. 문화전쟁과 무력전쟁의 시대에 문화국가와 국방국가가 만난다는 것이다.
문화국가의 맥락을 찾아서
문화국가론은 식민지 조선에도 전파됐다. 오쿠다이라 다케히코 경성제국대학 법학부 교수가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 1940년 9월29일자에 쓴 글에 따르면, 조선이 일본제국과 함께하며 인권과 복지를 중시하는 법치국가를 달성했지만, 이제 그 단계를 넘어 문화국가로 비약할 때가 왔다. 문화국가에 걸맞은 새로운 이념, 즉 개인 방임주의를 버리고 국가 ‘전체로의 귀일’을 완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패전 후 일본에서는 “다시 한번 국제사회로 뻗어갈 일본의 모습이 문화국가 아니면 안 된다는 점에 있어서는 신기할 정도로 국론의 일치가 존재”했다. 일본사회당 소속으로 1946년 중의원에 당선된 모리토 다쓰오가 그해 ‘문화국가론’이라는 글에서 한 말이다. 전후 일본의 문화국가론이 전전 문화국가론의 단순한 연장은 아니다. 하지만 “신기할 정도로 국론의 일치가 존재”했다면 연속성에도 주목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 연속성에 철저히 침묵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게 되는 것이다(이상은 다음을 참조. 이경희, ‘신국가 건설과 문화국가론의 전개: 패전 후 일본, 해방 후 한국’, 〈일본 사상〉 44, 2023).
이광수가 일본의 문화국가론 흐름을 몰랐을까? 그는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이었다. 몰랐을 리 없다. 그의 문화국가론이 개인의 자유로운 문화 활동에 대한 옹호보다는 모든 것이 변하는 세계에서 오직 혈통의 민족만이 영원하다는 민족유기체론에 입각한 것도 전전과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면모일 터이다.

한국 아이돌이 빌보드 차트를 ‘점령’하고,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한국 대중문화를 즐기는 시대다. 백범의 꿈이 이뤄진 걸까? 그 꿈의 이면에서 아이돌이 되려는 무수한 청소년들이 실낱같은 가능성에 인생을 걸고 ‘모 아니면 도’의 무한경쟁에 뛰어들고 있다. 수천억 원의 지분과 주도권을 둘러싸고 스타 경영진들이 극한투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 죽기 살기 경쟁이야말로 케이컬처 경쟁력의 원천이라는 믿음이 한국인들에게 널리 공유되고 있다.
전쟁이 아니라 사랑을, 강력이 아니라 문화를 찬미하는 ‘나의 소원’의 문장들은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 아름다운 문화를 ‘문화력’으로 재파악하고, 경쟁력 넘치는 문화 강국 실현의 전선에 나서자고 다짐하는 오늘의 한국인은 참으로 백범의 후예인 것일까? 어쩌면 이광수의 후예는 아닐까? 메이지 시대 이래 일본 문화국가론자들의 후예는 아닐까? 씁쓸히 묻는다.
조형근 (동네 사회학자)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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